한손엔 바둑돌, 한손엔 영어책…소설가가 되고픈 女기사

  • 입력 2009년 7월 1일 19시 02분


한국 여성 기사로선 처음으로 국수전 본선 진출한 조혜연 8단.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 여성 기사로선 처음으로 국수전 본선 진출한 조혜연 8단. 동아일보 자료사진
지난달 18일 서울 한국기원 일반 대국실. 마지막 반(半) 패를 잇는 조혜연 8단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373수의 긴 여정 끝에 바둑이 끝났다. 조 8단이 숙적 루이나이웨이 9단을 누르고 한국 여성 기사로서는 처음으로 국수전 본선에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이겼다는 기쁨보단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어요." 그만큼 긴장의 연속이었다.

조 8단은 루이 9단, 박지은 9단과 함께 한국 여성 바둑계를 이끄는 트로이카 중 한명. 1997년 12세에 입단(조훈현 이창호에 이어 3번째 최연소 입단)했으니 벌써 프로기사 13년차다. 1일 한국기원에서 만난 조 8단은 조지 오웰의 '1984'와 미치 앨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의 영어 원서를 들고 있었다.

▽루이나이웨이 9단과의 질긴 인연=조 8단은 지금까지 여류국수전 2번, 여류명인전 1번 등 세 번 우승했다. 그중 두 번은 루이 9단을 꺾고 우승한 것. 그러나 아픔은 더 컸다. 그가 거둔 9번의 준우승은 모두 루이 9단에게 패한 것. 역대전적 15승 29패.

"루이 사범님만 만나면 가슴이 답답했어요. 사범님 스타일은 파악했는데 어떻게 돌파해야할지 몰라서…."

루이 9단은 극복해야할 대상이지만 한편으론 고마운 존재다. 조 8단은 그를 떠올리며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채찍질한다.

"루이 사범님의 바둑에 대한 열정은 감탄스러울 정도예요. 그가 없었으면 한국 여성바둑이 지금의 수준까지 올라올 수 없었죠. 저를 비롯해 후배 여성기사들은 루이 사범님보다 덜 노력하는 점을 반성해야 합니다."

요즘 루이 9단은 조 8단과 바둑을 두게 되면 '또 만났구나'라는 듯 빙그레 웃는다고 한다. 조 8단도 화답한다. 오랫동안 대결을 펼친 승부사끼리만 느낄 수 있는 애틋함 같은 것이다.

▽학업과 바둑 콘텐츠=그는 고려대 영문학과에 2006년 입학해 3학년에 재학 중이다. 프로기사 중엔 대학에 입학한 뒤 바쁜 대국 일정 때문에 학적만 걸어놓는 경우가 많지만 조 8단은 '학업과 바둑'을 둘 다 소홀히 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학점은 4.5 만점에 평균 3.5점.

"일부에선 '바둑 외길'을 가라고 해요. 한창 젊을 때 한 우물을 파서 정상까지 오르라는 거죠. 지금은 바둑 못지않게 학업에서도 꼭 해보고 싶은 꿈이 생겼어요. 나중에 돌아보면 후회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생긴대로 산다'고 저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물론 바둑이 주업이고 학업은 부업입니다."

학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꾸는 꿈은 소설가. 바둑을 비롯해 다양한 소재로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는 것. 그는 이것이 '바둑 콘텐츠' 확산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또래 친구를 만나면 바둑의 바자로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바둑에 관심을 가지려면 '바둑 수법'을 알려주는 것과 함께 바둑과 관련한 콘텐츠가 많아야겠죠."

그가 최근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실은 창작사활집을 낸 것도 그 일환이다.

그는 또 '경이로운 세계'(full of surprise)라는 영어 블로그를 운영한다. 세계 각국에서 찾는 하루 이용자가 최소 1000명이 넘는다.

"블로그에 제가 루이 9단과의 대국에서 느낀 바를 시리즈로 적었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전세계 바둑팬에게 바둑 정보와 프로기사들의 생각을 알려주는 통로가 별로 없는 거죠. 바둑을 세계화하려면 바둑의 묘미를 전해줄 다양한 방법을 개발해야 할 겁니다. 저도 노력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영어로 바둑 해설을 하다보면 기본적인 뜻은 전하겠는데 바둑의 깊이를 보여주는 표현은 쉽지 않아요. 좀 더 고급스런 표현과 용어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는 2008년 한국관광공사 홍보대사로도 위촉돼 2년간 활동하고 있다. 바둑이란 분야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이 있는 점이 고려됐다고 한다.

▽'동냥젖'으로 큰 천재=1990년대초 PC통신 '천리안' 바둑에선 아이디 '꿈꾸는 초보'가 화제를 모았다. 바둑은 아마 정상급인데 알고 보니 열 살짜리 소녀였다. 그 소녀가 바로 조혜연 8단. 그는 종교적 이유로 일요일에도 바둑을 둬야하는 한국기원 연구생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조 8단은 아마 강자들이 모인 PC통신 바둑을 두기 시작했고 그가 열 살 소녀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임동균 박영진 등 아마 강자들이 무료 지도기를 두며 조련하기 시작했다. '동냥 젖'으로 컸다는 말이 그 때 나왔다. 조 8단은 임동균 박영진 아마 7단 등을 스승으로 여긴다.

"당시 아마추어 최상급 기사들이 저를 대가없이 벼려준 셈이죠. 아직 '여자 중에선 제일 잘 두고 남자와 동등하게 두라'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직 기회는 많고 무대는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적 이유로 일요일 대국을 하는 정관장배 세계대회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한국기원이 설득했지만 "단체전이라 다른 팀원에 폐를 끼치지 않고 제 신념도 지키기 위해선 불참이 불가피하다"고 조 8단을 말했다.

최근 바둑계를 달구고 있는 이세돌 9단 사태를 물어보았다.

"젊은 기사들이 기사총회에서 결의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은 '형, 좀 앞으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정도였는데 이 9단이 상처를 깊게 받은 것 같아요. 아마 사태가 이렇게 확산될 줄 알았으면 '모종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결의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9단이 젊은 기사들 뜻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네요."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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