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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5월 31일 16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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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5만 원 권의 도안이 공개됐을 때 "신사임당을 기생처럼 그렸다, 주모처럼 그렸다. 표준영정과 다르게 그렸다. 공모전을 했어야 한다. 인물 화가나 여자 화가에게 맡겼어야 더 의미 있다"는 등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5만 원 권 화폐를 그린 한국화가 일랑 이종상 화백(71)은 "화폐가 만들어져 나오는 과정을 모르니까 그런 말들을 한다"고 이 같은 비난을 일축했다. 27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서 만난 이 화백은 5만원권 화폐의 그림이 "1965년 신사임당 표준 영정을 그린 이당 김은호 선생이 생전 소원처럼 한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고친 것"이라고 들려주었다.
● 신사임당 영정 이렇게 그렸다
"이당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제게 신사임당 영정을 다시 고쳐야 한다고 하셨어요. 사임당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고 연지가 다 날아가서 얼굴에 병색이 뚜렷합니다. 이당 선생이 사임당을 그릴 때 심적 고초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최씨 문중의 독촉이 심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당 선생의 영정을 기본으로 하되 용안에 점정하듯 눈동자에 명암대비를 줬고 입술 연지도 다시 살렸습니다. 또한 표준 영정의 사임당은 19세기 의상과 머리를 하고 있어 16세기 양반가 귀부인과 맞지 않기 때문에 고증을 거쳐 새롭게 바꿨어요."
그는 신사임당이 "당대의 신여성"이라고 말했다.
"사임당은 임신한 몸으로 강릉 친정으로 가 친정어머니를 모셨고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도 7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냈어요. 사대부 가문의 여성 중 자유로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지은 분이 얼마나 될까요. 한국 여성계에서는 신사임당의 고액권 선정을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해요."
5000원 권에 새겨진 율곡 이이의 영정도 그의 작품. 그는 50년 넘게 영정을 그려온 국가표준영정 심의위원이자 화폐를 그린 화가 중 마지막 남은 생존 작가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5000 원권은 이당 선생이 그리도록 돼 있었어요. 그런데 끝내 못 그리고 쓰러지시는 바람에 제가 그리게 된 거예요. 화폐를 그릴 때는 지킬게 너무 많아요. 부정을 탈까봐 남의 문상도 못가고, 사고 난 데도 못가죠. 매일 기도하고 향 피워놓고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가 영정 기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종의 어진(御眞) 화가 이당 김은호 선생의 이름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서울대 미술학도였던 1960년대 초반 그는 궁정 화가들의 전통 기법을 배우고 싶어 무작정 와룡동에 위치한 이당 선생의 집을 찾아갔다. 화폐를 그린 운보 김기창(1만 원권), 현초 이유태(1000 원권), 월전 장우성(100원 동전) 등이 모두 이당 문하에서 수학했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선 이 화백을 본 이당 선생은 '서울대생이 내 집 문턱을 넘은 것은 처음'이라며 반가워했다고 한다. 이당은 고학생이던 이 화백을 배려해 레슨비도 받지 않고 가르쳤다. 그렇게 배운 조선 궁중의 영정 기법은 다른 한국화 기법과는 상당히 달랐다고 이 화백은 회고했다.
"영정 기법 중에 육리북채(肉理北彩)라는 게 있어요. 육리는 피부 바로 밑에 있는 얼굴의 근육을 말합니다. 우리 초상화는 점(點)을 여러 번 찍어 선(線)이 됩니다. 이렇게 얼굴 근육을 표현하면 웃는 듯 우는 듯한 미묘한 표정이 됩니다. 그리고 북채는 배채(背彩)라고 하는데, 그림 뒤에 은은하게 배경 같은 색을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인품을 넣는다고 말해요. 인품이라는 게 눈에 안 보이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북채의 원리예요. 그런 초상화는 영락없이 진짜 비단을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고 얼굴도 살아 있는 사람처럼 혈기가 돌아요."
● 돈 그리는 사람과 옷깃만 스쳐도 부자
'돈 그리는 사람과 옷깃만 스쳐도 부자가 된다'는 속설 때문에 이 화백의 손을 만져 보거나 사인을 받겠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한다.
한 때 한국은행에서 5000원권 2장을 붙인 소장용 지폐를 1만 4000원에 발행한 적이 있다. 여기에 이 화백이 사인을 한 지폐는 45만 원에 팔렸다. 십수 년 전에는 한 수석(壽石) 동호회에서 이 화백이 직접 사인을 한 지폐를 한 아름 받아다가 회원들에게 판 뒤 중국의 한 수몰지구 초등학교에 전달한 적이 있다. 수석을 캐러 갔다가 허름한 임시 건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안타까워 모금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이 화백에게 SOS를 요청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 화백의 사인 덕에 목표했던 5000만원을 달성해 무사히 학교 건물을 지어줄 수 있었다. 이 화백이 강연회를 할 때면 일본 화폐 수집가들도 단체로 2장짜리 5000 원 권에 사인을 받아갔다고 한다. 이 화백은 기자에게 "나를 인터뷰 했으니 삼대가 부자가 될 것"이라며 농을 하기도 했다.
이종상 화백은 원로 화가지만 근엄하게 화실이나 강의실에만 앉아 있지 않는다. 32년 전부터 독도를 오가며 개인 재산을 털어 '독도문화심기운동'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가 그린 독도 그림만 600여 점. 유럽과 미국 각국에서 전시도 했다. 그는 동해에서 독도를 지키는 5000t의 국내 최대 군함 '광개토대왕함'의 명예 함장이기도 하다. 고구려 벽화 연구, 고구려문화 지키기 운동도 했다. 이 때문에 '좌경'으로 의심받아 71년쯤엔 중앙정보부(현재 국정원)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돈을 그리는 사람은 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 화백은 "돈을 그린 선배 화가들이 '돈은 돌이 아니라 돈으로 봐야 하네'라고 들려준 적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은 천리안을 가지고 있고 귀가 밝기 때문에 돈을 뒤에서 따라가지 말래요. 돈은 그런 인간을 싫어한대요. 돈은 내가 쫓아가려 하면 멀리 도망가지만 정말 온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면 내 뒤에서 나 모르게 따라온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앞으로도 초가집 신세는 못 면하겠구나!'하고 한숨을 쉬었어요. 하지만 살면서 보니 정말 맞는 얘기였어요. 요즘 정가에서 돈 때문에 얼마나 사건이 많아요? 돈은 살아 있는 생물입니다. 돈을 돈으로 보고 존중해야 돈복이 와요. 돈을 돌로 보면 사람을 쳐서 죽일 수도 있어요."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