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재발견 30선]<15>행복한 만찬

  • 입력 2008년 10월 29일 03시 01분


◇행복한 만찬/공선옥 지음/달

《그 곡물과 채소와 어패류와 향신료와 열매와 뿌리와 그것들이 그 속에 내장한 그 내력들이 나를 키웠다. 나는 그것들을 먹고, 그것들이 모양으로 맛으로 향기로 빛깔로 말해주는 소리를 듣고, 그것들이 보여주는 몸짓을 보며 컸다. 내가 먹고 큰 그것들을 둘러싼 환경들, 밤과 낮, 바람과 공기와 햇빛,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몸짓, 감정들이 실은 그것들을 이루고 있음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

유년의 밥상, 시큰한 추억

한 가지 재료에서 느낌도 맛깔도 다른 여러 음식이 탄생한다. 땅과 들밭에 뿌리를 둔 그것들은 계절에 따라 가공하기에 따라 무공무진하게 변신하기에 매끼 정갈히 차려진 밥상 위엔 산천의 사계도 함께 보인다. 사시사철, 때에 따라 소박한 음식을 준비했던 어머니의 손끝맛과 사랑도 함께 느껴진다.

소설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고구마, 쑥, 무, 다슬기탕, 시래기, 고들빼기, 계란같이 흔하고 흔한 우리 음식들을 그러한 추억의 만찬장 위로 하나씩 불러내 26편의 산문으로 엮어냈다.

이 책에 나오는 음식들은 무엇 하나 거창하거나 특별하지 않다. 이 땅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에 얽힌 소박한 추억 몇 개씩은 가지고 있을 법하다. 겨울 아침 솔솔 풍겨오는 고구마밥의 냄새, 여름 내 맛있게 먹곤 했던 호박잎쌈과 호박을 숭숭 썰어 넣고 끓인 된장국, 가을의 풍성함을 전해주는 추어탕…. 저자는 가공되지 않은 천연의 재료가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고 자라나는 과정부터 음식이 불러오는 유년시절의 시큰한 추억까지 꼼꼼히 되짚는다. 고들빼기김치를 보면 논둑에서 고들빼기를 캐다 벌 떼를 만나 도랑물 속에 처박혔던 추억에 쪽파와 함께 섞여 잘 삭은 한 접시의 고들빼기를 좋아했던 동네 풋각시들의 웃음이 함께 떠오른다. 비료공장 노무자였던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직접 담가 머리에 이고 찾아갔던 시래기된장범벅도 잊을 수 없다. 시래기 다발을 보며 늘 ‘뻐근한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은 먹을 것 없던 시절 ‘배곯을 염려’가 덜어졌다는 안심 때문이었지만 지금 눈물이 맴도는 것은 시래깃국이 끓는 동안 들어갔을 어머니의 눈물이 더는 없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자란 이들은 알기 힘든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향취도 그득하다. 스스로 거름발 좋은 곳으로 줄기를 뻗어나가는 호박은 측간의 벽과 지붕을 타고 올라 영근 것이 가장 맛있다. 저녁 무렵 눈밭에 고구마를 던졌다가 한밤에 땡땡 언 그것을 깎아 먹는 즐거움, 유월에서 칠월 초쯤 배게 나온 메밀 싹을 솎아 내 무쳐 먹는 맛 등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아무데서나 나지만 막상 찾으려고 하면 아무데도 없는 방아잎부침개의 향, 배고픈 한여름 별미였던 동부죽 등 촌부들이 즐겨 먹던 소박한 음식들도 맛깔 나게 되살아난다. 이제는 너무 흔해서 소중함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쌀밥의 귀함도 새삼 느낀다.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하기까지 온 가족의 정성이 버무려졌고 찔레꽃 향기와 뻐꾸기 소리, 국화꽃 향기와 쓰르라미 소리가 모두 쌀밥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말하는 만찬은 산해진미 귀한 것들은 아니지만 평범하고 소박한 음식들을 향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 우리 산천에서 나는 음식들을 소재로 한 이 이야기들이 산바람, 풀냄새를 물씬 풍기며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제각각 사연 가득한 음식들을 곱씹어 가노라면 한상 푸짐하게 차려진 정갈한 밥상을 받아든 것처럼 배가 부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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