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Black&White]여자기사들이 ‘뿔’난 사연

  • 입력 2008년 10월 25일 07시 56분


23일 한국기원(이사장 허동수)의 2층 대회장에서는 제7회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최강전의 예선 1차전이 열렸습니다. 한중일 3국에서 각각 5명씩의 대표선수들이 출전해 국가대항전을 벌이는 인기기전이지요.

그런데 이날 대회는 본래 하루 전인 22일에 예정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선 1차전이 연기되면서 2·3회전 대회 역시 모두 하루씩 밀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데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22일 오후 2시.

대국통지서를 받은 여자 기사들은 바둑을 두기 위해 한국기원 대회장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표선수 5자리 중 한 자리에게 부여되는 시드자가 이민진 5단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애초 기사들이 받았던 대진표에는 이민진 5단이 김수진 2단과 대국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민진이 시드로 빠지면서 김수진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부전승을 올리게 된 것이지요.

문제는 이처럼 중요한 시드배정이 대회가 시작되는 당일에 발표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최소한 2주일 전에는 발표를 하는 것이 정상인 데다, 이번 경우는 아예 대진표까지 나와 있는 상태에서 시드를 냈다는 점에 여자 기사들은 분노했습니다.

여류 기사회 회장인 윤영민 2단이 한국기원 사무국으로 올라와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습니다.

결국 오후 2시 대국은 물 건너갔고, 여자 기사들은 대국 대신 긴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 결과, 이미 대회가 시작되었으니 원활한 대회 진행을 위해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되 한국기원에 대해서는 공식사과와 함께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내는 수준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한국기원으로서도 억울한 면이 없지는 않아 보입니다.

시드는 후원사가 정하게 되어 있는데, 후원사인 한국인삼공사에서 이민진의 시드 확정사실을 22일 오전에야 알려온 것이지요.

결국 23일 한국기원 담당자가 대국장으로 내려가 공식 사과를 했고, 대국은 정상적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이번 사태의 밑바탕에는 한국기원의 전형적인 졸속행정과 사고 불감증, 그리고 평소 불이익을 받아 왔다고 여기고 있던 여자 기사들의 불만이 깔려 있다고 보여집니다. 승부가 직업인 프로기사들에게 대회 시작을 코앞에 두고 대진표를 바꾸는 일은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상당히 모욕적일 수 있습니다. 여자 기사들이 화를 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자 기사들도 모두 참가하는 기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곱게 넘어갔을 리가 없지요.

한국기원에서는 이번 일을 두고 사후수습에 전전긍긍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사후수습 중 하나는 이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기원 사무국에 연락한 결과 별다른 얘기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좋은 게 좋은 것’으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좋은 게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게다가 ‘좋은 것’을 ‘좋게’ 보아 넘기지 않을 팬들이 이번 일을 주시하고 있음을 대회 관계자들이 깨달아 주었으면 합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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