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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14일 19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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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사상, 체제의 最前線
1920년대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간 우리 젊은이들은 연극에 주목했다. 조선의 문맹률은 80%가 넘었다. 당시 동아일보가 ‘기막힌 무식의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장님(문맹) 없애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촉구했을 정도였다. 서구의 발전된 문물이 빠르게 전해지는 도쿄에서 유학생들은 조선의 낙후된 현실에 절망하며 연극을 통한 계몽운동에 뜻을 모았다. 연극은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매우 효과적인 전달 수단이었던 것이다.
1921년 여름 도쿄 유학생들은 드디어 부산에서 함흥까지 전국 25개 도시를 순회하며 연극공연을 했다. “순회극단은 가는 곳마다 끓는 듯한 환영을 받았다. 극장을 가득 메운 군중은 ‘잘한다. 참 잘한다. 과연 잘한다’며 손에 못이 박이도록 두드렸다. 박수소리는 갈채를 의미하는 것보다 큰 사상이 일치되는 것을 뜻했다.” 당시 기록은 폭발적인 반응이 뒤따랐음을 전해준다.
민족 계몽을 위한 연극 운동에 이어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 연극 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세계를 휩쓴 사회주의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도 크게 번질 때였다. 잡지 ‘연극운동’은 ‘우리의 연극은 공장에서 농촌에서 투쟁에 궐기한 혁명적 노동자 농민의 예리한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사회주의 연극 운동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전시체제로 돌입한 이후 일단 잠잠해진다.
1940년대 우리 연극은 수치와 양극단의 시대를 맞았다. 일제는 전쟁 동원을 위해 연극을 이용했다. 전국을 순회하는 극단을 조직해 곳곳에서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이른바 황도(皇道)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광복 이후 혼란기에는 정반대 일이 벌어졌다. 좌익 연극 단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 공산주의 선전에 앞장섰다. 불과 얼마 사이의 변화에 사람들은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을 전후로 연극인 80%가 월북을 하고 20%가 남쪽에 남았다고 전해진다. 각자 월북의 사연이 있을 터이지만 대개 북한의 활동 여건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을 주축으로 한 북한의 공연예술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기술적인 면에서 남한을 앞섰다. 한국이 세종문화회관과 국립극장을 서둘러 지은 것도 북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에 오늘날까지 남은 것은 ‘아리랑’ 같은 체제 선전극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예술의 필연적인 종착점이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에도 연극 운동이 이어졌다. 권위주의 정권이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고 민주화 과정에서도 민중극 같은 것이 있었다. 역사의 고비마다 연극은 최전선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극의 선전 효과가 크게 줄면서 위상도 축소됐다. 그런데도 지난 정권에서 좌(左)편향 문화정책이 강력히 추진된 것처럼 연극을 운동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운동 아닌 예술의 새 출발점
소설가 현진건은 1920년대에 ‘예술이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절대로 구속을 거부한다. 요즘 예술은 사상의 철쇄에 얽매여 질식하고 있다’고 썼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70, 80년 전의 이 한마디가 지금도 유효한 현실이 답답하다. 아직 우리 문화계는 현진건의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운동으로서의 연극은 사라지고 있고 또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연극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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