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낮아진 시선 더 깊어진 사랑…정호승 시인 새 시집 ‘포옹’

  • 입력 2007년 8월 31일 03시 03분


《사랑은 실천이다.

구걸하는 사람의 손에 동전을 놓아 주는 것, 그러면서도 그 사람에게 “사람들의 몸을 만지면서 돈을 달라고 하진 마세요” 라고 당부하는 것. 고아한 개념이 아니라 손을 뻗는 행위가, 불편한 말도 용기 내 할 수 있는 행위가 사랑이다.

정호승(57·사진) 시인은 ‘사랑은 디테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시도 그렇게 됐다.》

새 시집 ‘포옹’(창비)은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겐 좀 낯설 듯싶다. 그의 시에는 방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먹는 소년,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노숙인, 타이어 조각에 의지하는 걸인이 등장한다. 시어는 맑고 결이 곱지만 장면은 투박하다. 그런데 뭉근한 ‘무엇’이 있다.

‘나는 그대의 불전함/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배고픈 불전함/동전 한 닢 떨어지는 소리가 천년이 걸린다/내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내 손이 먼저 무량수전 마룻바닥을 기어가듯/천년을 기어가/그대에게 적선의 손을 내미나니/뿌리치지 마시라 부디’(‘걸인’에서)

“무를 갖고 전에는 깍두기를 크게도 좀 작게도 담갔다면…. 요즘은 무채를 만든다고 할까요. 그렇게 섬세하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와 같은 대중성이 덜어진 대신,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같은 1970, 80년대 시집이 떠오른다고 했더니 정 씨는 “그런가요?”라며 웃었다. 시를 쓰는 동력은 달라졌지만 낮은 곳으로 눈을 돌렸던 그의 시선은 다르지 않다.

아버지가 그의 시에 등장한 것은 변화다. 자상한 성품을 시화하기 어려웠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아들의 부탁에, 일본 사진작가가 쓴 ‘마더 테레사의 삶 그리고 신념’을 번역하고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허물어지면서 시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까만 나팔꽃 씨를/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아침마다 창가에/나팔꽃으로 피어나/자꾸 웃으시는 아버지’(‘나팔꽃’)

나팔꽃 씨를 환약으로 잘못 알고 먹은 뒤 나팔꽃으로 피어나신 아버지, 일생을 못처럼 벽에 박혀 무게를 견디다가 빠져나오면서 구부러지신 아버지…. 부모의 늙음을, 연약해짐을 한눈에 체감하게 되는 순간, 자식은 죽음을 뜻하는 한자어 사(死)가 왜 ‘저녁’과 ‘비수’가 합해진 것인지 알게 된다. 죽음은 저물 무렵 느닷없이 꽂히는 비수 같다는 것을.

“어쩌면 시는 시대와, 그 시대에 속한 나의 삶이 겪는 고통에 대한 기도일지도 모른다”는 정 시인.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부러짐에 대하여’) 같은 시인의 간절한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위무가 될 것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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