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리처드 로티 교수 “보편적 진리는 없다” 플라톤에 반기

  • 입력 2007년 7월 1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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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8일 미국 철학계의 이단자 리처드 로티(사진) 스탠퍼드대 교수가 췌장암으로 숨졌다. 향년 76세. 그는 ‘미국의 데리다’라 할 만큼 포스트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주요 외신에선 그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았고 국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그는 분석철학 중심의 미국 철학계에서 이단적 존재였다.

로티 교수는 진리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서구 철학 전통을 맹렬히 비판해 상대주의자, 현대의 소피스트, 반(反)철학자로 공격받았다. 다른 한편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상 멸실된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을 부활시킨 네오프래그머티즘의 기수라는 점에서 진정한 미국 철학자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한국 사회는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 속에 서구 합리주의 전통을 비판한 그의 이론 수입에만 급급했다. 1996년과 2000년, 두 차례나 그를 초청할 만큼 호기심은 컸으나 독일 철학이 강세인 한국에서 그의 철학은 여전히 겉돌았다. 별세를 계기로 그의 철학 세계를 들여다본다.

○ 로티는 왜 문제적인가

1931년 뉴욕에서 태어난 로티 교수는 14세에 시카고대에 입학할 만큼 조숙한 천재였다. 일찍부터 궁극의 진리를 추구했던 플라톤에 심취했던 그는 20세에 플라톤 철학의 한계를 파악하고 결별을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철학계는 논리와 언어를 중시하는 분석철학이 지배적이었다. 그 역시 분석철학으로 25세 때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30세에 프린스턴대 교수가 되면서 분석철학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러던 그가 1979년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발표하며 플라톤 철학과 분석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첫 주저로 꼽히는 이 책에서 그는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로 이어지는 철학 전통을 본질주의, 정초(定礎)주의, 표상주의라고 비판하며 철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 진리를 담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발 더 나아가 ‘철학하기’와 ‘문학하기’를 동렬에 놓고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참신한가가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이는 연암 박지원이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으로 몰린 것과 같은 파문을 미국 철학계에 가져왔다. 그는 결국 동료 교수와의 갈등 끝에 버지니아대로 옮겨야 했지만 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며 자신만의 철학을 펴 나갔다.

○ 로티는 상대주의자인가

로티는 참된 지식으로서의 진리는 언제든 오류 가능성이 있으며 인간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역사적 조건 하에서만 진리라는 프래그머티즘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이는 프래그머티즘이 실용주의로 번역될 때 발생하는 오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적당주의 내지 결과만 중시하는 도구주의에 빠졌다는 오해를 낳았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 사상가인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근본주의의 위험성을 가장 정교하게 이론화한 실천철학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은 여기에 공(公)과 사(私)의 구분을 도입했다. 타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실천이 공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이론화하는 것은 시를 쓰는 것과 같은 사적 행위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반(反)철학자라 불릴 만큼 급진적인 로티 철학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실제 로티는 이론적으론 포스트모던 문예철학을 펼쳤지만 이를 정치 현실에 바로 적용하려는 ‘문화적 좌파’를 비판하며 의료·교육·조세 개혁과 같은 구체적 민생정책을 지지했다.

로티 밑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이유선 군산대 연구교수는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라는 철학의 기존 담론구조를 버리자는 로티의 말을 상대주의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달은 보지 못하고 이를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 관련 저술

로티의 저술은 민음사에서 번역 출판된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실용주의의 결과’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등이 있다. 로티의 사상을 다룬 개론서로는 ‘리처드 로티’(이유선·이룸), ‘로티의 신실용주의’(김동식·철학과현실사), ‘로티’(데들레프 호르스터·인간사랑) 등이 있다.

한국학술협의회 학술지 ‘지식의 지평’ 최근호까지 2회에 걸쳐 실린 김우창 고려대 교수와 서신대담 ‘아시아의 주체성과 문화의 혼성화’에선 투병 중임에도 진지한 논쟁을 펼친 노학자의 정열을 확인할 수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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