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1907년 12월 사재를 털어 평북 정주군에 설립한 민족학교로 다석과 함석헌은 이 학교에서 교장과 학생으로 만나 평생 사제의 연을 맺었다. 다석은 YMCA 한국인 초대 총무였던 김정식의 인도로 기독교에 귀의한 뒤 교육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씨ㅱ(영원한 생명)사상을 구축했다. 함석헌은 1921년 20세에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해 만난 다석과 1924년 일본 유학생활 때 만난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평생의 스승으로 섬겼다.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내가 만난 유영모와 함석헌’이라는 발표문에서 1939년부터 1일 1식을 실천하고 부인과 성생활을 중단하는 해혼(解婚)선언을 한 뒤 공부와 사색에 몰두한 다석의 기인적 삶과 그를 통해 생명사상에 눈을 뜬 함석헌의 인연을 자세히 소개한다.
김 교수는 다석이 오산학교에서 같이 교단에 섰던 춘원 이광수에 대해선 “그 사람 글 쓰는 재주가 좀 있는 사람”이라고 딱 한마디로 평가했지만, 인촌 김성수에 대해서는 2시간이 넘게 칭송했던 일을 회상하며 자신은 비록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인촌에 대한 존경의 염을 갖게 됐다고 소개했다.
박재순 씨ㅱ사상연구회 회장은 3·1운동과 광복, 분단과 6·25전쟁, 4·19혁명과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격변 속에서 함석헌이 어떻게 다석의 생명사상을 실천적 사상으로 변모시켰는지를 발표한다.
박 회장은 “함석헌은 대한제국 말 문명개화론자에게 영향을 끼친 사회진화론적 힘 숭배 사상과 달리 고난과 약함을 배려하는 생명살림과 사랑의 전체주의를 지향했다”고 밝혔다.
한국외국어대 이기상(철학) 교수는 ‘다석 유영모의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이라는 발표문에서 다석이 사용한 독특한 우리말 어휘 개념을 풀어내면서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 하이데거의 사상과 비교해 그 영성의 현대적 의미를 파헤쳤다.
이 교수는 “다석은 마치 자신의 삶 전체를 생명이라는 놀음판에 판돈을 걸고 죽기 살기의 모험을 벌이듯 치열하게 살다 갔다”며 “그의 삶이 곧 그의 생명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는 인류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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