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별빛이 쏟아지다…작가 오경환씨 개인전

  • 입력 2005년 10월 25일 03시 16분


하늘이 좋은 날이면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난다는 자유인 오경환 작가는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전시장에 나타났다. 자신이 그린 밤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작가에게 기자가 “넥타이를 풀고 소매를 걷어야 예술가처럼 보인다”고 권하자 멋쩍은 듯 포즈를 취했다. 신원건 기자
하늘이 좋은 날이면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난다는 자유인 오경환 작가는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전시장에 나타났다. 자신이 그린 밤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작가에게 기자가 “넥타이를 풀고 소매를 걷어야 예술가처럼 보인다”고 권하자 멋쩍은 듯 포즈를 취했다. 신원건 기자
《작가 오경환(65) 씨가 전시회를 앞두고 기자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는 프리뷰 행사를 연다고 해서 갔더니 정작 오 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아침 태백산 단풍이 절정이라는 아침뉴스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는 것이다.》

며칠 뒤 그를 만났다. 넥타이를 단정히 맨 깔끔한 양복 차림에 두꺼운 뿔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즉흥적인 사람일 것이라는 예상이 무너졌다. 산행(山行)은 즐거우셨느냐고 물었더니 느닷없이 바지 왼쪽을 걷어 올렸다. 어른 손바닥만 한 붕대가 붙어 있었다. 단풍 구경은 고사하고 비가 와서 내려오는 길에 미끄러졌다고 했다.

말쑥한 양복과 그 속에 숨어 있는 다리의 상처. 그게 작가 오경환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지난 40여 년을 교육자와 작가라는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살았다. 구름이 너무 좋아 서울 청량리역에서 훌쩍 기차를 타고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는 자유인이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을 세우고 미술원장으로 정년퇴임한 제도권 조직의 리더였다.

화풍(畵風)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주’를 주제로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해 시류와 상관없는 그림을 그린 듯 보이지만, 5·18민주화운동(1980년) 때 목이 잘린 사람을 그리기도 했고 주류 화단에 반기를 든 대안그룹인 ‘제3그룹’을 만든 현실참여 작가이기도 했다.

“대조적인 삶의 방식을 모두 거쳐 온 것 같은데 괴리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열 받으면 열 받는 대로, 나설 일이 있으면 나서며 그렇게 살았다. 다만, 늘 이쯤이면 됐다 했을 때 뿌리치고 빠져 나왔을 뿐이다”고 했다. 그의 이 말처럼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어느 편’이나 ‘어느 쪽’이 아니라 끊임없는 호기심과 예술을 향한 열정이었다.

21일 개막돼 11월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 3개 층 전관에서 열리는 그의 대규모 개인전 제목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김희령 일민미술관 디렉터는 “정년이 지났으면서도 늘 도전하는 젊은 예술가로 살고 있는 작가의 작업세계를 돌아보는 일은 곧 한국 현대미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해 보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제목을 붙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에 이르는 120여 점의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대형 캔버스에 검고 짙푸른 우주공간과 화려한 빛을 발하는 행성들, 별과 운석을 응용한 추상작들은 마치 우주공간이나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우주는 초월의 영역이다. 신비이면서 절대이고 땅이 아닌 하늘이다. 그가 최근 들어 이 ‘하늘’에서 내려와 풍경이나 정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투병 때문이다. 대장암 2기 진단을 받고 오랜 투병 끝에 병을 이겼다는 그는 “몸이 아프니, 구체적인 일상이 새롭게 보였다”고 했다. 이번에 나오는 멕시코 페루 인도 이집트 풍경, 정물, 인물을 담은 스케치, 드로잉, 소품들은 육체의 고통을 통해 개안(開眼)한 작가가 새롭게 만난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타고난 낙천가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다는 그에게도 절망이란 게 있을까. “60이 넘은 이 나이에도 그림이 안 될 때 절망한다. 그래서 자꾸 떠나고, 술 퍼마시고 혼자가 되는 것이다(그는 서울의 가족과 떨어져 지금 경남 거제도에 혼자 살면서 오전 2시에 일어나 그림을 그린다). 어쩌면 예술가란 평생 절망을 연습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런 절망이 있기에 그것을 이겨내야 그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02-2020-2055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