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프리즘]詩와 축구의 아름다운 만남

  • 입력 2005년 9월 9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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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귄터그라스의 시 ‘공은 둥글다’를 담은 전자우편카드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귄터그라스의 시 ‘공은 둥글다’를 담은 전자우편카드
‘내 공은 한쪽이 찌그러졌다./어렸을 적부터 난 누르고 또 눌렀지만/내 공은 늘 한쪽만 둥글어지려 한다.’ (귄터 그라스의 ‘공은 둥글다’)

그렇다. 공은 둥글다. 지구도 둥글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 않다. 세상도 그렇지 않다. 둥근 곳도 있고 찌그러진 곳도 있다. 잘사는 곳이 있으면 못 사는 곳도 있다. 삶은 늘 불완전하다. 세상도 역시 그렇다.

독일이 내년 월드컵(6월 9일∼7월 9일 12개 도시)을 앞두고 ‘월드컵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다. 괴테와 하이네를 배출한 나라답게 ‘축구와 문학의 만남’이 이뤄졌다. 199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양철 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78)와 200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급진 여류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59)가 잇따라 축구시를 선보였다. 일제 아이힝어, 울리케 드레스너, 페테르 에스테르하지, 프란초벨, 로베르트 게른하르트, 우어스 비드마이어 등 또 다른 6명의 독일 작가들도 앞 다퉈 축구시를 내놓았다.

이들의 시는 5000장의 포스터로 만들어져 개막전이 열리는 뮌헨과 결승전이 열리는 베를린 등 8개 도시의 길거리에 7, 8월 두 달 동안이나 나붙었다. 지하철역이나 시내버스 등 곳곳에도 이들 시가 걸렸다. 작가들도 각 도시를 돌며 자신의 시를 낭송했다.

이들 시는 축구 명언을 모티브로 해 지은 게 특징이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베른의 기적(영화로도 만들어짐)’을 연출한 제프 헤르베르거 서독대표팀 감독의 명언 ‘공은 둥글다’도 그중 하나. 당시 서독은 푸스카스가 이끄는 세계 최강 헝가리에 예선에서 3-8로 졌지만 결승에선 4-2로 이겨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2004유럽축구선수권(유로2004)에서 홈팀 포르투갈을 1-0으로 누르고 그리스를 승리로 이끈 독일 출신 오토 레헤겔 감독의 ‘경기는 90분 동안 계속된다’도 소재로 쓰였다. ‘경기는 90분 동안/계속된다. 90분은/ 얼마나 길까? 그것은/함께하는 사람들이 없다면/얼마나 길까? 그것을/누가 과연 참을 수 있을까?’(일제 아이힝어)

이 밖에 ‘진실은 그라운드에 있다’ ‘다음 경기가 늘 가장 어렵다’ ‘게임이 끝나면 모든 것은 게임 전과 똑같다’ 등의 명언들도 주옥같은 한 편의 시로 다시 피어났다. 이 중 페테르 에스테르하지의 시 ‘어느 늙은 축구선수의 노래’는 ‘삼팔선-사오정-오륙도’로 비유되는 요즘 한국 직장인들의 삶을 얘기하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하다. 공을 차고 싶은데 공이 없다. 운동장도 없다.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드디어 인생 종료 휘슬이 울린다.

다음 경기가 늘 가장 어렵다. 아니다./가장 어려운 것은 경기가 없을 때다. 경기가 없다./그래도 경기는 90분 동안 계속된다./공이 없다. 그래도 공은 둥글다./그라운드가 없다. 그래도 진실은 그곳에 있다./그래, 그런 것 같다./종료 휘슬이 불면 경기는 끝난 것이다.

늙은 축구선수는 갈 곳이 없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운동장에 있다. 독일의 극작가 페터 한트케는 ‘페널티킥을 마주한 골키퍼의 불안’이라는 작품으로 ‘현대인의 삶’을 형상화한 바 있다. 한트케는 ‘축구공은 불확실한 것, 행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축구 시는 친구나 지인들에게 전자우편카드로도 보낼 수 있다(www.arte-tv.de/poesie 참조). 이 행사를 주관한 독일 정부와 후원사인 독일 아르테 TV는 내년 3∼5월 독일 여성 작가들의 ‘축구 에세이’ 축제를 열 예정이다. 축구와 문학이 만나는 나라. 내년 독일 월드컵은 아무래도 ‘시 같은 월드컵’이 될 것 같다.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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