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의 돌, 생명을 품다…조각가 이영학씨 ‘물확’展

  • 입력 2005년 7월 26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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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 옛 돌을 조각해 물과 풀 이끼를 담은 다양한 물확 작품으로 4년 만에 개인전을 여는 조각가 이영학 씨가 평소 즐겨 입는 모시 한복 차림으로 전시장에 나왔다. 아래의 사진은 이 씨의 물확 작품들. 원대연 기자
화강암 옛 돌을 조각해 물과 풀 이끼를 담은 다양한 물확 작품으로 4년 만에 개인전을 여는 조각가 이영학 씨가 평소 즐겨 입는 모시 한복 차림으로 전시장에 나왔다. 아래의 사진은 이 씨의 물확 작품들. 원대연 기자
《물확이란 게 있다. 절구처럼 가운데를 움푹 판 돌이다. 사찰이나 한옥 정원에 가보면 만날 수 있는 아름답고 운치 있는 물건이다. 이 물확이 도심 한 가운데로 나왔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뒤 두가헌 정원에는 화강암 옛 돌에 물과 풀 이끼를 담은 다양한 물확 20여 점이 놓여 있다. 한국 조각계의 대표작가 이영학(57) 씨 작품들이다.》

작가는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며 모은 향교의 바닥석, 댓돌, 집터 둘레석, 주춧돌 등 다양한 돌을 작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조각해 현대적 물확을 만들어 냈다. 흔히 볼 수 있는 둥근 형태가 아니라 직사각형으로 길게 혹은 L자 형태로, 또는 가운데 홈을 파 미로처럼 만든 것 등 다양하다. 분명 인공의 산물인데도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물건처럼 보인다.

작가는 가운데에 물을 담거나 이끼, 생이가래 등 다양한 야생풀들을 채웠다. 이 야생풀들 역시 지리산 500∼600m 고지 등 전국의 산하에서 채집한 것들이다.

30여 년 동안 무쇠 청동 나무 흙 돌을 어루만지며 토속적인 한국 정서를 표현한다는 평을 들었던 작가는 4년 전에는 연탄집게, 가위, 호미, 낫, 문고리, 나무 빨랫방망이 등 농기구와 가재도구로 ‘새(鳥)’ 연작 등 신출귀몰한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이번 물확 전은 기존 작품들과는 완전히 달라진 신작전이지만 집요하게 한국 미의 재발견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된다. 4년 만에 여는 전시에서 작가는 “사물의 본질에 더 천착했다”고 말한다. 그 본질은 다름 아닌 ‘생명’이다.

“돌은 물을 먹어야 제 색깔을 드러낸다. 돌, 물, 풀은 생명의 본질이다. 우리는 맑은 물을 잃었듯 맑은 심성을 잃었다. 분주한 생각, 남을 미워하는 생각을 잠시 쉬고 우리 주변의 것들을 사랑으로 즐기자는 마음을 작품에 담았다.”

작가는 “너무 알려 하고, 너무 많이 가지려 하는 우리 욕심이 고통을 부른다”며 이번 전시 콘셉트가 ‘귀허(歸虛)’라고 소개했다. 텅 빈 곳으로의 돌아감이다.

시원한 모시 한복을 입고 전시장에 나타난 작가. 혹 고리타분한 옛것 지상주의자가 아닐까. 하지만 사실 그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정통 조각의 본고장이라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8년 동안 서양조형문화를 공부한 유학파다. 가난과 결핍, 고독과 싸우며 그가 배운 것은 다름 아닌 ‘한국 미와 정신’의 재발견이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양문화가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양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에서 출발한 문화이지만 우리 문화는 물질을 이해하려 했고 더 높은 곳에 올려 놓으려 했다.”

탁월한 재능으로 로마의 스승들을 경탄케 했던 인체조각을 그는 귀국하자마자 그만뒀다. 그리고 이 땅의 물건들에 눈길을 돌렸다. 그리하여 지나가 버린 것, 사라진 것, 버려진 것들을 가지고 다가올 것, 새로운 것, 귀중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더 이상 인체조형을 주업으로 하지는 않지만 이탈리아의 인체조형 거장 에밀리오 그레코에게 배운 사람답게 간간이 하고 있는 흉상작업은 국내 최고라는 평이다. 김수환 추기경, 서양화가 장욱진, 중광 스님, 시인 구상, 소설가 박경리 등 문화계 거장을 비롯해 최근에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흉상을 제작했다.

물과 돌과 풀이 어우러진 전시장은 무더위를 한꺼번에 씻어낸다. 한여름 피서 전시로도 손색이 없는 그의 신작전은 8월 20일까지 열린다. 무료. 02-3210-2111

허문명 기자 ang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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