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엿 살 철부지 때
할아버지께 붓글씨 배웠지요
종이 귀할 때라 마분지에다
한일자 열십자 수월찮이 그렸지요
종이에 흰 구석 남긴 날
그분께서 꾸짖으시기를
듣거라
최생원네 손자 공부하는 법이니라
연필로 먼저 쓰고 그 위에
철필로 다시 쓰고 그 위에
또다시 붓으로 빽빽이 써서
그 종이에 허연 데 도무지 아니 보이구서야
뒷간으로 보내느니라-
눈물 그렁그렁
꿇어앉아 그 말씀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부아통이 터졌지요 그래
징게맹경 어딘가에 최생원네 손자란 놈
제아무리 잘났어도
똥구멍 새까만 놈일 거라 생각했지요
- 시집 ‘하늘밥도둑’(창작과비평사) 중에서》
똥구멍은 새까말지언정 참으로 옛사람들 학문하는 법이 빈틈없는 줄을 알겠다. 대엿 살 때부터 ‘천자문’ ‘소학’ ‘동몽선습’을 위로 읽고 아래로 쓸었으니, 예습과 복습을 온몸으로 하였구나. 그뿐인가? 저 먹물 마분지에 쓰인 ‘우주홍황(宇宙洪荒)’이 인분과 함께 잘 곰삭은 다음, 텃밭에 고루 뿌려졌을 것이니 그 기운 받은 김장무며 배추조차 ‘공자왈 맹자왈’이렸다. 저 시를 읽다보니 문득 ‘호박잎’, ‘새끼줄’, ‘신문지’, ‘두루마리’, ‘비데’가 순차적으로 떠오르며 감회가 새로운 건 웬일인가?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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