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다시 일어서라! 반달곰

  • 입력 2005년 4월 7일 16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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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류장에 머물고 있는 '반돌이'. 지리산을 헤집고 다니며 '악당' 노릇을 하던 시절이 그리울까.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지만 반돌이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계류장에 머물고 있는 '반돌이'. 지리산을 헤집고 다니며 '악당' 노릇을 하던 시절이 그리울까.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지만 반돌이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곰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과 친숙한 동물이다.

반달가슴곰인지, 아니면 불곰인지는 알 수 없어도 곰은 단군신화에서 주역의 하나다. 신화에는 곰이 ‘라이벌’ 호랑이와 벌였던 ‘마늘과 쑥 먹기’ 대결이 등장한다. 결국 쑥과 마늘을 먹으며 우직하게 버틴 곰이 호랑이를 제치고 여자(웅녀·熊女)가 됐다고 하지 않던가.

지리산 반달가슴곰(반달곰). 천연기념물 제329호이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 이제 곰은 ‘복원 프로젝트’라는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이 힘든 동물이 됐다. 아이들의 눈에는 가슴에 ‘V자’ 무늬가 있는 검은 반달곰보다 노란색 ‘곰돌이 푸’가 더 익숙할지 모른다.

지난달 30일 반달곰이 사는 전남 구례군을 찾았다. 구례구역에서부터 ‘반달곰 있는 절’이라는 이정표가 나오는 것을 보니 예사롭지 않다. 여기는 지리산, 반달곰의 고향이다.

● 핏줄이 뭔지…

반달곰 관리팀 사무실 옆에 마련된 계류장에서 처음 만난 반돌이와 장군이(이상 ♂)는 사람이 나타나도 꿈쩍 하지 않았다. 2001년 ‘반달가슴곰 복원 프로젝트’에 의해 3년간 야생상태로 지리산에 방사됐던 이들은 지난해 6월부터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철창으로 사방이 막힌 80평쯤 되는 공간이다.

반돌이는 잠시 낯선 사람들을 쳐다보다 이내 귀찮은 듯 하품을 했다. 장군이는 장난감으로 넣어준 꽝꽝나무 줄기를 계속 물어뜯고 있다. 계류장 생활에 익숙한 막내(♀)는 비교적 편안한 모습이다. 막내는 방사 50여일 만에 등산객과 배낭을 놓고 씨름하는 등 먹이를 ‘구걸’하다 야생생활이 어렵다는 판정으로 일찌감치 계류장에서 생활하고 있다.

먹이를 담당하는 대원 조동현(30) 씨는 “반돌이와 장군이가 처음에는 우리에 갇히면서 스트레스가 컸던지 하루 종일 벽을 본 채 뒤편에만 있었다”며 “계류장 생활에 차츰 적응하면서 요즘에는 장난도 치고 활동량도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지난 3년간 두 수컷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타’가 됐다. TV 자연 다큐멘터리는 여러 차례 이들이 야생 생활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곰 팔자’는 시간이 아니라 혈통 문제다. 이들은 지난해 4월 유전자 분석 결과 토종 반달곰과 다른 것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야생 곰의 유전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격리됐다. 그 대신 그해 10월 러시아 연해주 출신의 ‘고아 곰’ 6마리가 지리산에 방사됐다.


2001년 2월 사육농장에서 태어난 반돌이는 야생생활에 빠르게 적응하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였다. 왼쪽부터 반돌이의 생후 4개월째(2001년 5월), 야생에서 두 번의 겨울을 넘기며 덩치가 부쩍 커진 반돌이(2003년 4월), 치료를 받다 탈출한 뒤 잡히는 장면(2004년 3월), 계류장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2004년 6월). 사진 제공 반달가슴곰 관리팀

● 빵과 자유

오후 5시경 반돌이의 눈에서 생기가 돌았다. 그의 ‘배꼽시계’는 정확하다. 어느새 반돌이는 두 발을 밥통 위에 얹은 채 휘둘러댔다. 고양잇과 동물과 달리 3cm 정도의 발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큼지막한 ‘곰 발바닥’이다.

이들은 야생상태에서는 도토리와 취나물 곰취 등을 먹었지만 이곳에서는 하루 두끼 3kg의 사료를 먹고 있다. 생후 400g 안팎이었던 이들의 몸무게는 네 돌이 지나자 반돌이와 장군이는 140kg, 암컷인 막내는 80kg로 불어났다.

스스로 먹이를 구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사라졌지만 야생의 자유로움은 잃어버렸다. 이들은 모르고 있지만 생애 최대의 위기도 있었다. 유전자 판정 이후 대책회의에서 이들의 진로에 대한 여러 의견이 나왔다. 만약 사육농장으로 돌아갔다면 몇 평 우리에서 몸을 부대끼며 당장 내일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을 것이다. 자연에 그대로 두되 거세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결국 세 곰을 계류장에 두면서 교육 홍보용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한상훈(44) 반달가슴곰 관리팀장은 “복원 프로젝트는 반돌이와 장군이가 이름까지 가지면서 국민들과 친숙해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며 “두 곰이 야생곰과 결합할 경우 복원과정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격리가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바뀐 환경에 대한 이들의 적응력은 놀랍다. 두 수컷은 동면의 경험이 있지만 이번에는 겨울잠을 자지 않았다. 인공 동면 굴을 만들었지만 자동차 야영장의 불빛과 소음 등이 이들에게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 1인자와 2인자

‘곰 아빠’로 불리는 한상훈 팀장(앞줄 왼쪽) 등 반달가슴곰 관리팀 대원들이 팀에서 기르고 있는 개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강병기 기자

돌아온 곰들의 권력관계도 바뀌었다. 어릴 때 장군이를 졸졸 따라다니던 반돌이가 일본 씨름 스모를 연상시키는 몇 차례의 힘겨루기 끝에 1인자가 됐다.

실제 지난달 31일 ‘곰들의 만찬’에서는 이들의 역전된 관계가 그대로 드러났다. 먹이를 함께 주면 ‘첫 발가락질’은 반돌이의 몫. 성질 급한 반돌이가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나서야 주위를 떠돌던 장군이가 식사를 했다. 배설 습관도 차이가 있었다. 반돌이는 당당하게 중앙을 중심으로 잘 보이는 곳에, 장군이는 이를 피해 가장자리나 뒤편에 ‘실례’를 했다.

대원 김보현(34) 씨는 “어릴 때 가장 힘이 세고 리더 역할을 해서 지어준 이름인데 요즘 장군이가 이름값을 못한다”며 “1인자가 된 반돌이가 털의 윤기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군이의 호기심은 여전하다. 장군이는 요즘 한창 성(性)에 눈을 뜨고 있다. 곧잘 막내와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한다. 반돌이는 1인자로 올라섰지만 사랑보다는 장군과 막내를 괴롭히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장군이도 몇 차례 막내와 접촉하는 시늉을 냈지만 아직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게 관리팀의 귀띔이다.

● 반돌이의 ‘쇼생크 탈출’

관리팀을 가장 괴롭힌 것은 유전자 판정과 ‘쇼생크 탈출’을 연상시키는 ‘반돌이 탈주 사건’이다.

관리팀은 2003년 11월 16일 동면을 앞둔 시점에 반돌이의 발신기 성능을 확인하다 목에 상처가 난 것을 발견했다. 치료를 위해 보호시설에 두었으나 반돌이는 새벽 철창 아래 땅을 파헤치고 달아났다. 이때부터 곰과 사람의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이듬해 3월 4일까지 100일 넘게 계속됐다. 반돌이는 신출귀몰했다. 대피소와 한봉장에 나타났다는 제보를 받고 쫓아가면 이미 사라진 뒤였다.

“반돌이는 벌써 다녀갔다.…생포틀을 교묘하게 피해 벌통의 꿀을 먹고 달아난 것을 보면 영리하고, 배도 잔뜩 고픈 모양이다. 토굴에 피해조사를 갔는데 김치며 감자통이며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벌건 고춧가루 묻은 똥도 싸고 갔다.…하루빨리 포획돼 지리산 넉넉하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살기를 바란다. 반돌아! 보고 싶다!”

야간 잠복근무와 꿀벌 미끼에도 잡히지 않는 반돌 추적에 실패한 뒤 한 대원이 일지에 남긴 글이다.

대원 이윤수(30) 씨는 “내 인생 중에서 반돌이를 생포했을 때가 가장 기쁜 순간의 하나”라며 “반돌이가 대원들을 고생시켜 힘들었지만 야생 곰으로 당당하게 동면을 하고 추운 겨울을 넘겨 대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 미련 ‘곰탱이’라니요?

2003년 5월 측정된 반돌이의 오른쪽 '곰발바닥'. 발톱까지 포함해 20cm에 이른다.

반돌이와 장군이는 피아골 대피소와 암자를 15번이나 털었다. 벌통 피해는 402건에 이른다. 벌과 꿀 피해에 대해 보험회사를 통해 지불된 보상액이 1억2500만 원에 이른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을 ‘곰탱이’라고 부르지만 곰이 사람 머리 위에 앉아 있다는 게 관리팀의 증언이다. 두 곰은 벌통을 털 때 벌을 유인하기 위해 벌통 안에 놓인 설탕물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두기도 했다. 끈에 묶인 개에게는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아 유유히 곁을 지나간다. 등산로 주변에 사람이 지나가면 포복 자세로 몸을 숨기고 동면 굴에 들어갈 때는 자신이 밖으로 나온 것처럼 보이려고 뒷걸음질을 쳐 들어간다. 개미를 사냥할 때는 나뭇가지에 침을 묻히기도 한다. 몸에 좋다는 고로쇠 수액에도 손을 댄 흔적이 있다.

대원 하정욱(32) 씨는 “꿀을 훔치다 현장에서 적발된 곰이 벌통을 옆에 끼고 부리나케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 웃음도 나오고 황당하다”고 말했다.

곰은 신화에서처럼 쑥과 마늘을 잘 먹을까? 실험 결과 쑥은 곧잘 먹지만 마늘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게 관리팀 얘기다. 가끔 밀랍이 ‘특식’으로 나오면 약간의 소동이 일어난다. 야생에서 맛본 꿀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한 팀장은 “반돌이와 장군이는 뛰어난 적응력으로 야생동물 복원에 대한 희망을 주었고 관리팀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반달곰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됐다”고 말했다.

※반돌아! 장군아! 숙소도 곧 조용한 숲 안쪽에 800평 규모로 넓힌다고 하니 조금 기다려라. 너희들 역할이 주연에서 ‘홍보대사’로 바뀌었다고 슬퍼할 것은 없을 것 같다. 다른 야생 곰이 늘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고뭉치’ 듀엣을 기억할 터이니.

구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강병기 기자 arche@donga.com


▼연해주産 토종곰과 같은 혈통 지리산 등 2022년까지 방사▼

나무 위에서 장난치고 있는 러시아 연해주 출신 곰들.

지난달 31일 전남 구례군 문수리 신율마을.

반달가슴곰 관리팀원들이 이 일대에서 동면 중인 러시아 연해주산 곰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만복 화엄 칠선이는 나무 둥지에서, 제석 천왕 달궁이는 동굴을 선택해 겨울잠을 자고 있다. ‘6번’으로 불리는 달궁이의 신호가 잡혔다. 달궁이에게 부착된 발신기에서 분당 43회의 신호음이 포착된다. 활동 상태가 아니라 아직 동면 상태다.

반달곰은 분포 지역에 따라 7개의 지리적 아종으로 분류되는데 지리산 반달곰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북동부에 서식하는 반달곰과 함께 ‘우수리군’에 속한다. 사육농장 출신인 반돌이와 장군이는 중국 남부, 막내는 일본 계통으로 드러나 야생 반달곰과의 ‘접촉금지령’이 내려진 상태다.

반달곰은 V자의 독특한 가슴 무늬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문 베어(Moon Bear)’, 일본에서는 츠키노와구마(月輪熊), 또는 초승달이라는 의미의 단어(미카즈키·三日月)을 사용해 미카즈키구마(三日月熊)로도 부른다. 반달곰의 영어 명칭을 문 베어로 통일하자는 주장이 제기돼 내년 일본에서 열리는 곰 학회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반달가슴곰 복원 프로젝트’의 성패는 성공적인 ‘2세 탄생’에 의해 좌우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지리산 동쪽에 서식하는 6, 7마리의 야생 반달곰과 연해주산 반달곰의 결합이다. 연해주 곰들이 성장해 교미가 가능해지는 4, 5년 뒤의 얘기다. 이 같은 ‘혼인 정책’이 없을 경우 현재 야생 곰의 개체 수를 감안하면 20, 30년 뒤 멸종될 가능성이 높다.

한상훈 관리팀장은 “개체 수가 적으면 근친교배 등으로 결국 멸종이 불가피하다”며 “토종 반달곰의 혈통을 이어가려면 연해주 곰과의 결합을 통해 안정적인 개체 수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매년 5, 6마리씩 총 30여 마리가 지리산에 방사될 계획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총 400억 원이 투입되는 반달곰 프로젝트는 지리산(2002∼2012년)에 이어 오대산(2008∼2017년), 월악산(2012∼2022년) 등에 차례로 반달곰을 방사해 백두대간의 생태계를 이어가자는 것이다. 북한에서 반달곰을 들여와 지리산에 방사하는 ‘야생동물의 남북 교류’도 추진되고 있다.

관리팀에 따르면 지리산에 서식할 수 있는 반달곰의 적정 개체 수는 150∼200마리. 지리산의 면적으로는 더 많은 곰이 생존할 수 있지만 먹이사슬, 등산객과 지역 주민의 고로쇠 약수 채취 등 사람들의 활동이 많다는 점을 감안한 수치다.

반달곰이 국내 야생동물 가운데 복원 1호가 된 것은 사회적 조건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 민족과 친근한 반달곰의 상징성과 대형 포유동물이 지닌 생태학적 가치를 감안한 것.

1990년대 후반 일부에서는 호랑이를 복원하자는 주장도 나왔지만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추진되지 않았다. 호랑이의 경우 먹이가 되는 멧돼지나 사슴이 주당 1마리가 필요해 지리산의 생태계가 감당하기 어렵다. 초식을 위주로 한 반달곰과 달리 인명이나 가축 피해도 우려됐다.

일부에서는 반달곰 복원의 기본적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지역 주민에 대한 정책적인 고려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주민 김석곤(51·문수리 밤재마을) 씨는 “아직 반달곰으로 인한 피해는 큰 편이 아니지만 곰의 수가 계속 늘어난다면 상황이 다르다”며 “고로쇠 약수 채취 등 주민들의 경제 활동이 어려워질 것이므로 곰뿐 아니라 사람을 위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곰 아빠’로 불리는 한 팀장은 “반달곰 프로젝트의 기본 취지는 곰만 보호하자는 게 아니라 곰과 인간이 공존하자는 것”이라며 “지속적인 노력이 기울여진다면 사람은 농사를 짓고, 곰은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일본이나 미국 국립공원의 풍경도 꿈은 아니다”고 말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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