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산책]‘사이드웨이’…여행길서 만난 중년 와인빛 사랑

  • 입력 2005년 2월 17일 15시 29분


코멘트
사진 제공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사진 제공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작가 데뷔를 꿈꾸지만 번번이 출판을 거절당하는 대머리 영어교사 마일즈(폴 지아매티)와 지금은 TV광고에 목소리 출연이 고작이지만 한때는 TV드라마 스타였던 잭(토머스 헤이든 처치). 대학 때부터 단짝인 두 중년 사내가 마일즈의 낡은 자동차에 올라타고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캘리포니아의 와인산지인 샌타 바버라 카운티의 포도농장들. 결혼 1주일을 남겨둔 잭은 솔로로서의 ‘마지막 자유’를 화끈하게 즐길 요량이지만 이혼 후 실의에 빠져 지내는 마일즈는 자신이 유일하게 열광하는 대상인 와인이나 한껏 마시는 것이 소원이다.

2005년 골든 글로브 뮤지컬코미디부문 최우수작품상과 각본상을 받은 ‘사이드웨이’(원제 Sideways)는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곁길’로 새 보고 싶은 늙은 피터팬들의 모험기다. 마음과는 달리 한껏 하늘로 날아오르기엔 몸도 마음도 너무 무거워진 두 사내. 여행의 또 다른 동반자인 와인은 두 친구와 여자들의 만남을 매개해주는 큐피드이자 두 남자가 스스로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곤경에 처할 때마다 낭패감을 달래주는 의리 있는 친구이며 삶의 이치를 일러주는 말 없는 현자(賢者)이기도 하다.

잭은 목표대로 여행 이틀째부터 포도주 시음장에서 일하는 스테파니(샌드라 오)와 눈이 맞아 곧장 뜨거운 관계에 빠지지만 헤어진 아내를 잊지 못해 술만 먹으면 주사를 부리는 소심한 마일즈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려 깊은 웨이트리스 마야(버지니아 매드센)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두 여자와의 꿈같던 데이트는 마일즈의 말실수로 잭이 곧 결혼할 것이라는 사실이 탄로 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데….

전작 ‘어바웃 슈미트’에서 괴팍한 은퇴남의 공허한 내면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해냈던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사이드웨이’에서도 퇴물이 되어가는 것에 초조해지는 두 중년남자의 심리적 격랑을 섬세하되 우울하지 않게 그려낸다. ‘뚱뚱이와 홀쭉이’처럼 기묘한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두 친구의 캐릭터 대비는 관객을 시종 킬킬거리게 만든다.

시도 때도 없이 달뜨는 성욕으로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려 하는 잭은 생각도 걱정도 없는 근육질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보쌈 당하다시피 하는 부잣집 사위 노릇이 영원히 자기 인생의 ‘종을 치는’ 잘못된 결정이 아닌가 두렵다. ‘문학도 와인도 이해하지만 잭의 성욕만큼은 이해 못하는’ 마일즈는 정신적으로 기품 있고 예술적인 삶을 꿈꾸지만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늙은 어머니의 쌈짓돈을 몰래 집어내야 할 만큼 넉넉지 못하다.

맥 빠진 중년의 피터팬들을 위로하는 술이 왜 맥주도 위스키도 아닌 와인일까. 자기과시를 위해 와인 애호가인 척하던 교수 남편과 이혼한 뒤 진실로 자신이 와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포도농장의 주인이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웨이트리스 마야의 말은 와인의 본질, 아니 ‘성숙’의 의미를 꿰뚫는다.

“와인은 살아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오묘한 맛을 내니까요. 와인이 그 절정에 이르면, 마치 우리가 61세가 되는 것처럼 그 맛은 서서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기울기 시작하죠. 그럴 때 그 맛이란…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그러나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내리막이 시작되기 전, 찬란한 절정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마일즈가 ‘결혼 1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장 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61년산 슈발블랑’을, 부유한 식당 주인과 재혼한 전처와 마주친 뒤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서 눈물로 범벅된 햄버거와 함께 삼켜버리는 것처럼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삶의 냉정한 얼굴이다.

와인 초보자이면 초보자인 대로 숙련된 애호가라면 숙련된 만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와인 시음장면과 ‘피노 느와’ ‘리슬링’ 등 와인리스트의 이름을 음미하며 입맛을 다실 수 있겠다.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한국계 캐나다인 여배우 샌드라 오(페인 감독의 아내이기도 하다)의 열연을 보는 것도 즐거움.

중년의 여자친구 ‘델마와 루이스’는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절벽 아래로 뛰어내림으로써 자신들의 삶으로부터 장렬하게 탈출했지만 마일즈와 잭은 지친 몸을 이끌고 떠났던 지점으로 돌아온다. ‘사이드웨이’가 주는 위로는 해피엔딩이 아닌 채로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잔잔하게 설득한다는 점이다.

머리숱이 듬성해지고 점점 등이 굽어가는 마일즈와 잭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를 의지해 걸어가는 뒷모습은 중년남성 버디무비의 기억할 만한 장면이다.

18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인 황성규 씨(서울대 언론정보학과 3년)가 참여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