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항일시인 ‘육사’ 六四→戮史→肉瀉→陸史로

  • 입력 2004년 8월 1일 21시 43분


항일 민족시인인 육사 이원록(陸史 李源祿·1904∼1944) 선생의 호가 그의 사상적 변화만큼이나 다양하게 사용됐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안동대 김희곤(金喜坤·사학과) 교수는 1일 경북 안동시민회관에서 열린 육사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육사의 한자가 六四→戮史→肉瀉→陸史로 네 차례나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육사라는 호는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의 죄수번호 ‘264’에서 음을 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출감 이후인 1930년 안동 도산면 원촌리에서 요양을 하던 육사는 ‘죽일 육’ 자를 사용해 ‘죽이고 싶은 역사’를 뜻하는 육사(戮史)를 비공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육사(戮史)를 계속 사용하면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집안 어른의 우려에 따라 뭍 륙(陸), 역사 사(史)로 한자를 바꿔 활동을 하게 됐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 “선생은 1932년 기자로 일할 당시 육사(肉瀉)라는 이름을 사용해 기사를 작성한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김 교수는 “‘죽이고 싶은 역사’ 또는 ‘고기 설사’라는 뜻을 담은 호들은 육사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증오하고 비아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14대손인 육사는 어릴 때부터 엄격한 유림(儒林) 분위기에서 한학을 배우다 40세를 일기로 숨질 때까지 다양한 사상적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김 교수는 “육사가 32∼33년에는 공산주의적 성향을 보이다 34년 이후에는 민족적 사회주의로, 이후에는 좌익과 우익을 아우르는 성향을 나타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육사는 변절할 수 없는 규범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영남의 유림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났기 때문에 일제치하에서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면서도 꺾이지 않은 독립투혼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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