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오정희 외국인 번역문학도들과 소설 ‘파로호’ 현장기행

  • 입력 2004년 5월 17일 18시 56분


강원 화천군의 파로호 앞에 선 작가 오정희씨(오른쪽 끝)와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외국인들. 실제 한국 소설 등을 번역해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한국어 작품을 중국 말로 번역하면 분량이 30% 가량 줄어들고, 영어로 번역하면 30%쯤 늘어난다”고 말했다.-권기태기자
강원 화천군의 파로호 앞에 선 작가 오정희씨(오른쪽 끝)와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외국인들. 실제 한국 소설 등을 번역해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한국어 작품을 중국 말로 번역하면 분량이 30% 가량 줄어들고, 영어로 번역하면 30%쯤 늘어난다”고 말했다.-권기태기자
대낮인데도 헤드라이트를 밝힌 군용 지프들이 긴 열을 지어 달려오고 있다. 그 오른편으로는 솔숲이 떠있듯 비친 푸른 물과 강 속의 섬이 보인다. 어디서던가, 그렇다. 오정희씨의 소설 ‘파로호’(破虜湖·1989년 발표)에 묘사된 바로 그 풍경 아닌가.

14일 작가 오정희씨와 미국 중국 캐나다 베트남 이스라엘 폴란드 출신 외국인, 교포 2세 등 10여명을 태운 한국문학번역원(이하 번역원)의 버스는 서울을 출발해 청평 의암 춘천 화천댐을 지나 파로호를 향해 가고 있었다. 번역원이 우리 문학에 관심이 큰 외국인들의 번역 지원을 위해 올 초부터 시작한 월례 강좌로, 이 날은 작품무대에서 ‘작가의 말’을 들려주려는 기획이었다. 참가 외국인 대부분은 서울대, 연세대에서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파로호는 6·25전쟁 때 ‘오랑캐(虜)를 깨뜨린(破) 호수’라는 뜻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은 이름입니다. 중국군 수만 명이 수장됐답니다.”

호숫가에 다다르자 작가 오씨가 말했다. 중국 하얼빈 출신의 전월매씨(33)는 “충격적”이라고 했다. 동행한 번역원의 박혜주 박사는 “김동리의 ‘흥남 철수’도 중국군과 관련된 문장 한 줄 때문에 중국 내 출판이 금지됐다”고 설명했다. 번역에는 고려할 점이 너무 많은 것이다.

오씨는 1984년부터 2년간 교환교수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머물렀던 것이 이 작품의 창작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교민사회가 광주항쟁이나 한국정부에 대한 입장차로 분열돼 있더군요. 시대상황이 이런 데도 한 여자의 무력감이나 외로움 같은 걸 써나가야 하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귀국해서도 고민이 여전했지요. 어느 날 평화의 댐을 짓기 위해 파로호 물을 비우자 선사시대 유적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어떤 텅 빈 듯한 이미지, 그게 글을 쓰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곧장 여길 찾았지요.”

작품 주인공인 소설가 혜순이 파로호를 찾은 이유는 작가 자신의 이유와 비슷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퇴고를 너무 많이 해서) 작품을 거의 외운다고 들었습니다.” (황 하이 반·27·베트남)

“어떨 땐 내용을 녹음해 듣기도 하지요. 그래도 빈틈이 많이 보여요.” (오정희)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 비슷한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스타일이 있어요.” (다프나 추르·31·이스라엘)

“저는 제 문체를 떠나지 못해요. 그게 제 개성, 체질이니까요. 묘사에 들어갈 때도 사물 하나하나 그 사전적 뜻을 넘어서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해요.” (오정희)

근처 개울가로 자리를 옮긴 뒤 황 하이 반씨는 오씨의 다른 작품인 ‘저녁의 게임’의 프린트를 들고 와 하나하나 묻기 시작했다. 깨알처럼 해석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물가의 돌밭에 선 교포 데니스 김(34·캐나다)이 “어디 타제석기 없나”하고 말하자 누군가 “잘 찾아봐, 정말 있을지 몰라”하고 답했다. ‘파로호’의 혜순이 소설 끝에 가서 쥐게 되는 타제석기, 수만 년의 비바람을 견딘 여인의 얼굴이 새겨진 흰 돌을 말하는 것이었다.

화천=권기태기자 kkt@donga.com

■ 작품 줄거리

1989년 발표된 오정희씨의 대표적 단편소설.

주인공인 소설가지망생 혜순은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교민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교민사회에는 80년 광주학살 촬영 화면이 전해져 보는 이들마다 분개하고, 분파들마다 반목하는 상황이었다.

혜순은 소설을 쓰려고 홀로 귀국했지만 ‘혀가 굳어져 버린 듯이’ 글을 쓸 수 없다.

어느 날 혜순은 파로호의 물을 비웠다는 기사를 읽고 텅 빈 호수를 보고자 길을 서두른다. 물에 잠겼다 드러난 호수 풍경은 그녀 내면을 조금씩 바꿔놓는다. 혜순은 호수 바닥에서 일하는 유적발굴단으로부터 여자 얼굴이 새겨진 아주 오래된 돌 하나를 건네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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