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민기자의 酒변잡기]순수의 보드카가 소금을 만나면…

  • 입력 2004년 4월 22일 17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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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주를 사랑한다. 그리고 압제와 굶주림에 시달려온 여러분 농민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내 조국 러시아를 더 사랑한다.”

러시아의 민중 영웅 스텐카 라진이 자신이 사랑하는 공주를 볼가강에 던지기 직전에 했다는 연설은 언제 떠올려도 비장하다. 17세기 농민 반란의 지도자였던 그는 공주의 아름다움에 빠져 동지들이 동요하고 질투하자 결국 사랑을 버렸다.

그러나 대의도 좋지만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물에 던지는 그 심정이 어땠으랴. 남몰래 흘렸을 한 사나이의 피눈물을 떠올리면 자못 숙연해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대학 시절 가졌던 순수함을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을 들으며 보드카를 마신다. 무색 무미 무취. 보드카는 순수성의 상징이다. 어떤 술이든 향과 맛이 있어야 한다는 통념도 여지없이 깨진다.

그 이유는 증류한 원액을 물로 희석한 후 자작나무 숯으로 여러 번 걸러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쓸데없는 맛과 냄새는 깨끗이 사라지게 된다. 아무런 맛이 안 나기 때문에 칵테일의 베이스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순수함을 즐기려면 아무 것도 섞지 않고 보드카만 마시는 게 제격이다. 보드카를 냉동실에 오래 넣어놓으면 끈적끈적한 겔 상태로 변한다. 이를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마시면 식도를 타고 넘을 때 얼음처럼 차가운 촉감이 러시아의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한 후배가 보드카에 소금을 타서 마시는 걸 봤다. 일본 청주(사케)나 멕시코 데킬라의 안주로 소금을 먹는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보드카에 소금이라니. 게다가 안주도 아니고 술에 직접 소금을 타다니.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은 높이 사줄 만했지만 보드카의 순수함에 대한 불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권유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손으로 조금 소금을 타봤다. 슬쩍 맛을 본 순간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보드카 특유의 느낌에 짠 맛이 조금 섞인 그 멋진 조화라니. 혁명도, 술도 처음의 순수함을 지키기는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팁 하나. 스텐카 라진의 이야기는 아내를 핑계로 술자리에서 도망치려는 동지를 붙잡는 데도 효과가 탁월하다.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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