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민기자의 酒변잡기]“좋은 술이 되거라”

  • 입력 2004년 5월 6일 17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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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참 오랜만에 편지를 띄웁니다.

며칠 전 두 분 결혼기념일이라고 전화 드렸을 때 “바쁠 텐데 뭐 그런 걸로 전화를 하냐. 언제 시간 나면 애비랑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셨죠. 부자간의 술자리라, 저야 별로 이상할 게 없지만 이런 얘기를 하면 주변에선 상당히 의아한, 또 부러운 눈빛으로 저를 봅니다.

그날 생각이 나네요. 십몇 년 전 어느 겨울밤 늘 술이 고팠던 친구들을 이끌고 충무로의 한 술집에 갔죠. ‘이게 웬 떡이냐. 홍모에게 모처럼 술 한 잔 얻어먹는구나. 그것도 시내에서’ 하는 생각으로 따라왔던 친구들은 뜻밖의 물주가 등장하자 몹시 놀랐습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심란해 하던 저와 친구들에게 그 때 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씀, 마늘 소스에 찍어먹던 북어와 생맥주의 기막힌 조화, 2차 소줏집에서 굽던 갈매기살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뿌듯했던 심정도. 친구들은 지금도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합니다.

이미 다들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아저씨 소리를 듣지만 언제든 다시 한 번 불러주시라고, 이번엔 저희가 모시겠다고 말입니다.

애주가이신 아버지는 위스키인 조니 워커 블랙 라벨을 즐기셨죠? 같은 조니 워커라도 골드나 블루 라벨처럼 더 오래 숙성된 원액을 쓰고 더 비싼 술도 있는데 왜 굳이 블랙일까. 술이란 모름지기 묵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던 제겐 한동안 의문이었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나 술이나 나이가 들면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게 세상 이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술은 세월이 흐르면 더욱 부드러워지고 순해지지만 어느 순간부터 처음 태어났을 때의 강건함은 조금씩 사라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깊이를 더 하면서도 초심을 잃지 않는, 그런 좋은 술이 되라는 가르침은 아니셨는지요.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증조할아버지부터 저까지 저녁마다 4대가 함께 술상을 받곤 했다죠. 앞으로 한 30년 더 사시면 그 모습이 재현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제 아이에게 자유로움 속에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그런 아버지가 되려고 합니다.

내일은 어버이날입니다.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곧 조니 워커 블랙 한 병 사들고 찾아뵈렵니다. 건강하세요.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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