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의 현대사]“스크린 속 역사도 진실에 바탕둬야”

  • 입력 2004년 2월 23일 18시 55분


코멘트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두 영화는 1000만, 500만의 관객 몰이에 성공했다는 사실 외에도 우리 사회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는 현대사의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 공통분모가 있다. 게다가 ‘실미도’는 1968년 1·21 청와대 기습사건을 계기로 창설된 684부대의 시말을, ‘태극기…’는 6·25전쟁을 각각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천편일률적인 냉전의식을 넘어섰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를 계기로 ‘영화 속의 한국현대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역사학자인 한홍구 교수와 ‘태극기…’의 제작사 명필름 소속 이은 감독의 대담을 통해 풀어봤다.》

▽한홍구=두 편 모두 한국영화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한국 사회의 금기와 성역이 깨져나가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 영화들도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 TV드라마에서 먼저 현대사 붐이 일었고, 영화는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이은=두 작품 모두 영화사의 차원을 넘어 한국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분명한 것 같다. ‘실미도’는 ‘북한=가해자, 남한=피해자’라는 일방적 도식을 넘어 우리도 ‘북파공작원’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게 했고, ‘태극기…’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우리 상황에서 ‘전쟁은 나쁜 것’이라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키지 않았나.

▽한=‘실미도’가 현대사와 정면 대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보다 ‘사나이 의리’가 더욱 부각된 점은 조폭영화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태극기…’ 역시 우리 현대사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기보다 ‘가족애’로 이를 덮은 측면이 있다.

▽이=영화를 대중의 ‘정신적 먹을거리’라고 본다면 이 두 작품은 분명히 ‘불량식품’은 아니다. 나아가 두 영화는 영화적 성숙도, 스토리 완성도, 문화 경제적 파급력에서도 모두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한=영화를 역사교과서로 볼 필요가 없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한 가지 묻고 싶다. 90년대 들어 ‘남부군’ ‘하얀 전쟁’ ‘태백산맥’ 등과 같이 현대사를 다룬 작품이 여럿 있었는데 이러한 시도와 이번 작품들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영화인들에게 나름의 ‘자기검열’이 있었던 것 같다. ‘남부군’이나 ‘태백산맥’의 감독들은 ‘레드 콤플렉스’를 깨는 것만으로도 진전이라고 생각했으리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작품들은 그런 영화적 성숙을 바탕으로 현대사에 직접 개입하려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현대사를 더욱 진지하게 다루는 작품들이 앞으로 어떻게 시도될지 궁금하다.

▽이=‘실미도’나 ‘태극기…’는 역사적 사건에서 소재를 택하되 대중과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수준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이를 ‘송환’ 등과 같은 다큐멘터리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앞으로 강제규 강우석 감독이 이런 영화들을 더 만들게 될지, 혹은 다른 감독들이 유행처럼 이런 영화들에 뛰어들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고, 두고 볼 일이다.

▽한=영화를 보는 대중의 관점을 짚어보고 싶다. ‘태극기…’는 전쟁이 나쁘다고 얘기하고, ‘실미도’ 역시 국가폭력(state terrorism)에 따귀를 올려치는 내용이다. 그러나 ‘실미도’를 본 관객이 혹시 “그때 김일성 목을 따러 갔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하게 될 여지는 없을까.

▽이=작가나 감독이 얘기하고자 한 철학을 대중은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실미도의 ‘적기가’ 문제 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면 큰 문제가 됐을 것이다. 엄밀한 고증이 생명인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섞이는 영화는 구별되는 것 아닌가. 다만 진지한 책들을 잘 읽지 않는 요즘 관객들이 영화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측면에서는 일정한 책임감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한=‘실미도’에서 평화통일을 얘기하는 중앙정보부 국장은 굉장히 이상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또 피도 눈물도 없고 미친 짓을 한 사람은 대단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차라리 이런 대목들에 문제제기가 이뤄졌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우리는 격변의 현대사를 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을 말하면 상처받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실미도’에서 김신조씨가 그렇다. 영화가 현대사와의 정면대결로 갈 경우 더욱 많은 갈등을 내포할 수 있다. ‘쉬리’나 ‘태극기…’를 진보적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만들어진 반공영화’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 않나. 여기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보아주는 성숙한 풍토가 절실하다.

▽한=다른 얘기지만, 최근 현대사를 소재로 한 일본군위안부 누드사진집 사건이 있었다. 군위안부의 역사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혀 고민 없이 현대사를 ‘소재’로서만 취할 때 생길 수 있는 결과를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시장이 이를 응징한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이=‘실미도’나 ‘태극기…’는 우리 사회의 다수가 현시점에서 동의할 수 있을 만한 관점을 도출해냈다고 본다. 이런 작업들이 더욱 생산적이기 위해선 현대사 연구자들의 몫이 중요한데….

▽한=사실 우리 사회의 현대사 연구자들은 몇 되지도 않고, 그나마 거의 ‘독학 세대’다. 그러니 대중과 호흡을 함께하는, 생동감 있는 연구가 됐겠는가. 그러나 최근 밝혀진 수지 김 사건 등과 같이 호소력을 가진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앞으로 이런 소재들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발굴해 내는 것은 학자들뿐 아니라 언론인 출판인 등의 공동책무다.

▽이=‘역사적 사실’이 갖는 절실함과 ‘대중적 상상력’의 분방함, 그리고 이를 읽어내는 ‘기획력’이 함께 어우러져 최근 영화의 르네상스가 왔다. 그런 점에서 영화건, 현대사 연구건 한두 명 감독과 학자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고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 좀 더 주목했으면 한다.

정리=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사진=박영대기자 sannae@donga.com

▼'현대사 재해석' 영화들은…▼

할리우드에서 현대사는 ‘영화 소재의 보고’다. 미국이 승리한 제2차 세계대전은 물론 치욕적 패배로 꼽히는 베트남전쟁도 수십 차례 영화화됐다. ‘디어 헌터’ ‘귀향’ ‘풀 메탈 자켓’ ‘플래툰’ 등 ‘영화가 역사를 해석한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이 제작됐다.

그러나 한국영화와 현대사는 결코 ‘밀월관계’를 맺지 못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63년) 등 6·25전쟁을 다룬 작품이 100편이 넘지만 대부분 국군의 활약상을 부각시킨 일방적 내용이었다. 70년대 후반까지 대종상에 ‘반공영화’ 부문이 있을 정도였다.

90년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은 영화를 통한 현대사 재해석의 물꼬를 튼 작품. 이 작품은 6·25전쟁 당시의 빨치산 활동이라는 금기영역을 깨고 나왔다. 그는 93년엔 ‘하얀 전쟁’으로 한국인의 시각에서 베트남전쟁을 다뤄 도쿄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94년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도 6·25전쟁 무렵의 좌우익 갈등을 그렸다. 우익을 ‘악의 대명사’로 비하했다는 논란 속에 공연윤리위가 “이념적으로 큰 문제 없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사회성이 가미된 작품을 선보여 온 박광수 장선우 감독도 잇달아 야심작을 내놓았다. 박 감독은 70년대 노동현실을 고발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95년)을, 장 감독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꽃잎’(96년)을 각각 선보였던 것.

다소 주춤했던 현대사와 영화의 만남은 ‘실미도’와 ‘태극기…’의 성공 이후 더욱 탄력을 받을 것 같다.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감독이 연출하는 ‘그때 그 사람’은 79년 ‘10·26사태’가 일어난 날 밤의 이야기를 경호원 입장에서 그린 작품.

그 밖에 정지영 감독은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아리랑’을,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은 ‘인혁당 사건’의 영화화를, ‘명필름’은 6·25전쟁 당시의 피란민 살상사건을 다룬 ‘노근리 다리’를 준비 중이다.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한홍구(韓洪九) 교수 프로필▼

△1959년 생

△1999년 미국 워싱턴주립대 문학박사

△현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 사무처장

△영화 ‘아리랑’ 기획 작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영화

전문잡지 ‘시네21’에 고정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이은(李恩) 감독 프로필▼

△1961년 생

△1995년 명필름 설립

△현 명필름 이사

△영화 ‘접속’ ‘섬’ ‘공동경비구역 JSA’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을 제작했으며 독립영화단체 ‘장산곶

매’대표를 역임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