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삼류를 연기하는' 일류'…‘삼류배우’ 주역 강 태 기

  • 입력 2004년 2월 4일 17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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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삼류 연극이에요. 삼류 배우가 나오잖아요. 하하하.” 중견 연극배우 강태기씨(54)는 스스로도 연극 제목이 재미있는지 이야기를 꺼내면서 한 바탕 웃어 젖혔다. 그는 5일 서울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막이 오르는 극단 미연의 ‘삼류 배우’(김순영 작, 연출)에 주인공 이영진 역으로 출연한다. 이영진은 30년을 연극배우로 지내왔지만 단역만 맡아온 무명 배우. 하지만 ‘언젠가는’ 하게 될지도 모르는 햄릿 역을 위해 매일 가족 앞에서 햄릿의 대사를 연습한다. 강씨는 “소극장 공연이라 더욱 감칠맛이 나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번 작품에서 ‘삼류 배우’를 연기하지만 연극계에서 그는 일찌감치 ‘일류’로 평가받아 온 배우다. 1975년 ‘에쿠우스’의 한국 초연 때 무대에 섰던 그는 광기어린 앨런 역을 연기하면서 일약 연극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이후로도 꾸준히 무대를 지켜왔다.

“‘에쿠우스’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 직후 내가 느꼈던 외로움은 말로 다 못해요. 더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던 거죠. 늘 주인공만 하다가 한번은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어요. 연극을 보러 온 어떤 평론가가 단역인 저를 못 알아봤는지 ‘누군데 저렇게 잘해?’하고 묻더랍니다. 그때부터 자신이 생기고 역할에 충실하게 됐죠.”

사실 연극배우만큼 힘든 직업도 없다. 사나흘에서 보름간의 공연을 위해 두 달여 동안 꼬박 연습에 매달려야 한다. 게다가 무대는 늘 긴장의 연속이다. 얼마 전 ‘에쿠우스’에 출연했던 중견배우 김흥기씨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도 그런 긴장감과 무관하지 않다.

이 작품은 무명 배우를 통해 이 같은 연극인들의 애환을 그렸다. 극 중 이영진의 중학생 아들과 대학생 딸은 단역을 전전하면서도 무대를 떠날 수 없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미장원을 경영하며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만이 그를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한 배우’로 인정해줄 뿐이다. 어느 날 이영진은 드디어 햄릿을 연기할 기회를 얻지만, 흥행을 고려한 제작자의 입김에 밀려 갑자기 배역이 바뀐다.

“연극배우가 갖는 아픔과 서러움을 잔잔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려나갑니다. 연극은 연륜이 필요한 예술 장르예요. 참고 기다리고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서 힘들지요. 그런데 요즘 젊은 배우들은 너무 급한 것 같아요. ‘반짝’ 뜰 수는 있어도 깊이가 생기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30년 넘게 배우를 해오면서 그가 연극배우 역할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젊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은 듯했다.

“무대에서는 일류니 삼류니 하는 구분이 없어요. 배우는 그저 자기가 맡은 배역을 충실히 해내면 됩니다. 그런 배우야말로 정말 ‘일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3월 1일까지. 화∼목 오후 7시반, 금 토 오후 4시 7시반, 일요일 및 공휴일 3시 6시. 8000∼1만2000원. 02-3676-9596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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