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무언의 테러 '사이버 왕따'

입력 2003-12-11 16:27수정 2009-10-10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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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세계에서는 친하다고 믿었던 상대방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차단 당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커뮤니티, 카페, 메신저, 일촌 맺기…. 보다 나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만들어진 사이버 세계의 도구들이다.

대개는 동아리, 친구, 선후배간의 정을 돈독하게 하는데 이용되지만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은 법.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이 반드시 오프라인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이버 커뮤니케이션 덕분에 양적으로 ‘친구’는 늘어났지만 진실로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많은 메신저 친구 중 당신이 ‘차단’한 사람은? 혹은 당신을 ‘차단’한 사람은?

시간, 장소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사이버 세계. 그 열린 공간이 주는 외로움의 아이러니.

○ 이건 ‘테러’야!

고려대 2학년에 재학 중인 엄모씨(21)는 최근 친구 A씨와 MSN 메신저로 대화를 하던 중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A씨는 과내에서 ‘왕따’로 분류된 친구. 엄씨 등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과 친구들은 메신저 내에서 A씨를 ‘차단’해 놓은 상태였다. 물론 당사자인 A씨는 이 같은 사실을 몰랐다.

A씨는 메신저로 대화 도중 자료를 부탁하자 엄씨는 무심결에 “지금 (메신저에서 온라인 상태인) ○○○에게 달라고 해”라고 했던 것. A씨가 “○○○? 나한테는 오프라인 상태로 돼 있는데?”라고 말하자 상황을 눈치 챈 엄씨는 “컴퓨터가 이상한가보다”며 황급히 대화방을 나갔다.

엄씨는 “그 사건을 계기로 A씨는 친구들이 자신을 메신저에서 ‘차단’해 놓은 것을 알게 됐고 한동안 풀이 죽어 수업도 제대로 안 들어오곤 했다”고 말했다.

‘친구등록’을 한 뒤 사용하는 MSN 메신저에는 ‘차단’ 프로그램이 있다. 자신이 온라인 상태라도 대화를 원치 않는 특정 상대에게는 오프라인 상태로 보이도록 하는 기능이다.

처음에는 ‘이 친구가 요즘엔 대화방에 안 들어오네’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감’이나 ‘말 실수’로 자신이 ‘차단’당한 것을 알게 된다.

대학생 김태영씨(24)는 “이용 시간대가 오후 10시부터 오전 1∼2시로 대부분 비슷해 상대방이 며칠씩 오프라인 상태로 있으면 일단 의심하게 된다”며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차단’ 당했을 때는 마치 ‘무언의 테러’를 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보통은 마음에 안 드는 이성, 불화를 일으킨 동료,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을 주로 ‘차단’ 하지만 문제는 이런 조치가 일방적인 것이라 당한 쪽은 불쾌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도 일부 사이트에서는 MSN 사이트에 로그인한 전체 명단과 내가 MSN 메신저에 친구 등록한 사람의 온 오프 상태를 비교해 주는 ‘잔인한’ 프로그램이 존재하기도 했다.

차라리 ‘삭제’를 하거나 안 친한 사람들은 아예 친구등록을 받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처음 친구등록 하자고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하거나, 친구등록을 했다가 삭제하겠다고 알릴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이버 세계에서는 친하다고 믿었던 상대방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차단 당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종승 기자

○ 풍요속의 빈곤

대학생 B씨(여)는 지난해 초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고등학교 반 친구들끼리 인터넷상에 만든 ‘카페’ 내에 친한 친구 5명이 따로 소모임을 만든 것.

당초 서로 잘 모르던 5명을 연결한 사람이 B씨인지라 당연히 가입하고 싶다고 글을 올렸으나 이들 5인방은 답신도, 연락도 끊은 채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B씨의 또 다른 친구 김모씨(22·여)는 “그 사건 이후 B씨는 술만 마시면 울면서 배신감을 토로하는 등 괴로워했다”며 “B씨는 지금 어떤 커뮤니티에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이버 세계의 상처는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모 사이트에는 ‘일촌 맺기’ 기능이 있다.

개개인의 홈페이지끼리 쉽게 연결되도록 일종의 ‘친구등록’을 하는 기능. 나와 일촌을 맺은 내 친구의 홈페이지를 통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홈페이지까지 방문(일명 파도타기)할 수 있어 밤을 새워 ‘파도’를 타는 네티즌들도 부지기수다.

이 일촌 맺기도 만약 일촌 신청을 거절할 경우 그 사람과 ‘원수’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 때문에 대개는 쉽게 일촌을 맺지만 그 안에서도 등급은 나뉜다.

관심 있는 사람은 자주 찾아가고 글도 남기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명색만 ‘일촌’.

대학생 남모씨(25)는 “70여명 정도를 일촌 등록했지만 자주 찾는 사람은 20명도 채 안 된다”며 “내가 자기 홈페이지를 안 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 특별히 문제가 없어도 소원해지기 쉽다”고 말했다.

남씨는 “차라리 등록을 안했으면 불편하지도 않을 텐데 결과적으로 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꼴이 됐다”고 말했다.

○ 또 하나의 고독한 군중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말한 ‘고독한 군중’은 겉으로 드러난 사교성과는 달리 내면적인 고립감에 번민하는 현대인을 지칭하는 말.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사이버 세계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조금씩 드러난다.

수많은 사이트와 커뮤니티, 친구들이 있지만 그 속에서 까닭 모를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사이버연구소 라도삼 박사는 “사이버 세계에서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의 다양함, 소속 집단과 친구 수 등에 있어서 현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으로 늘어났다”며 “그러나 이런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친밀감이나 깊이 등은 오히려 얕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단적으로 메신저에 등록된 친구의 수가 100여명을 넘나들지만 그 중에서 정말로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은 불과 몇 명 안 된다는 것.

오히려 서로 모르면 관계가 나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누구나 접근이 쉬운 사이버라는 공간 때문에 쉽게 관계를 맺었다가 등을 돌리게 되는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다.

라 박사는 “휴대전화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검색해 봐도 정말 전화를 걸고 싶은 사람이 거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또 무차별적으로 열려 있는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차단’ 같은 장치가 탄생했지만 현실세계처럼 실제 대화나 합의 같은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이뤄지다보니 소외감이 깊어지기 쉽다.

그는 “사이버 문화가 단기간에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반면 부작용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부족한 상태”라며 “기술의 발전이 주는 장점만 추구하다가는 언젠가 사이버 세계에서의 외로움과 고립감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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