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3년 11월 25일 18시 40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1922년 11월. 마침내 3200여년의 안식(安息)에서 깨어난 이집트 제18왕조 12대 왕 투탕카멘의 무덤. 그 일성(一聲)은 섬뜩했다. 그러나 영국의 젊은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와 후원자인 조지 카나본은 20세기 고고학 발굴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을 그냥 덮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저주가 쓰인 석판을 슬그머니 치웠다. 발굴은 계획대로 진행됐고 이렇게 해서 ‘파라오의 저주’는 수천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현실이 된다.
카나본은 투탕카멘의 미라를 본 뒤 고열에 시달리다 열흘 만에 숨지고 만다. 무덤의 벽을 허물었던 건축가 메이스도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했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촬영했던 라이드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급사했다.
발굴에 협조했던 13명이 발굴 1년 만에 사망했고 6년째인 1929년에는 희생자가 22명으로 늘어났다.
카터의 개인비서였던 베셀과 그의 부친도 숨졌다. 빌딩에서 투신자살한 베셀의 부친은 이런 쪽지를 남겼다. “더 이상 이 공포를 견딜 수 없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파라오의 저주’는 20세기의 미스터리로 부풀려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발굴 관련자들의 잇따른 죽음은 세균 감염에 의한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새로운 의문이 다시 꼬리를 물었다.
투탕카멘이 타살됐다는 증거가 나타난 것. 투탕카멘의 미라를 X선으로 촬영한 결과 두개골 뒤쪽에 누군가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함몰(陷沒) 흔적이 발견됐다. “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복수하겠다”던 투탕카멘의 전설이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발굴 관련자들의 죽음을 규명하는 ‘미궁의 문’은 열렸으나, 투탕카멘의 죽음은 여전히 ‘비밀의 방’에 갇혀 있다. 그리고 투탕카멘의 혈통을 밝히려는 DNA 검사가 이집트 정부에 의해 전격 취소됨으로써 이 둘을 잇는 ‘진실의 실’은 영영 끊기고 말았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