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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22일 17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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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온 시오노 나나미의 사랑 이야기 아홉 편.
작가는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혼자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 현장을 다니며 공부했다. 이 책 ‘사랑의 풍경’(원제 愛の年代記)은 1975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처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쓰면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시오노 나나미가 역사 저편에 숨어 있는 여인들의 사랑 이야기에 주목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작가가 창작의 힌트를 얻은 1차 자료들은 가짜 고문서, 오래된 소설을 비롯해 피렌체와 만토바, 베네치아의 연대기, 베네치아 해군사 등 픽션과 논픽션이 섞여 있다. 작품에도 투르크 연합 함대의 총사령관 우르그 알리 등 실존 인물들이 일부 등장하지만 내용은 픽션에 가깝다.
베네치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비앙카는 계모의 계략으로 수녀원 높은 담장 안에 갇혀 지내야 할 처지가 된다. 불행한 신세를 한탄하던 중 만난, 잘생기고 세련된 태도의 한 남성. 비앙카는 그와 피렌체로 야반도주해 그의 아내가 됐지만 그곳에서 토스카나 공국의 황태자 프란체스코에게 눈도장이 찍힌다. 그 후 오랜 세월 프란체스코의 정부로 지내다 정실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정식 대공비가 됐다.
명예롭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던 부부는 말라리아에 걸리고 만다. 대공이 사망한 지 12시간 만에 비앙카도 숨을 거두지만 평소 그녀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온 대공의 동생 페르디난도 추기경은 이들의 묘를 따로 안치했고 비앙카는 대공비 관을 쓴 초상화를 남기지 못한 유일한 대공비가 된다.(대공비 비앙카 카펠로의 회상)
비앙카의 이야기는 19세기 말에 발견된 고문서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야기로 작가는 한때 고문서 위조는 인텔리 귀족의 취미이기도 했다고 일러준다.
베네치아 공국의 해군사를 공부하던 중 시오노 나나미의 눈에 띈 작은 이야기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탄생시켰다.
사보이 공국의 피앙카리에리 백작 부인은 해적의 포로가 된 가신과 병사들의 몸값 교섭을 위해 우두머리 우르그 알리를 만난다. 왕녀를 만나겠다는 해적의 요청으로 백작 부인이 가짜 왕녀의 역할을 하겠다고 자청한 것. 의외로 정중한 알리의 모습은 백작 부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난데없이 거상을 통해 알리로부터 멋진 비단 한 필을 선물받은 백작 부인은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는다. 가슴에 간직한 연모의 정이 33세 여인을 소녀처럼 울게 한 것이다.
해적 우두머리는 알제리 장관을 거쳐 투르크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이 되고 백작 부인은 감기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남이탈리아에는 알리가 고귀한 이탈리아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 받고 그 품에서 하늘로 떠났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단편작가 반델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파리시나 후작 부인의 사랑’에는 의붓아들과의 사랑이 담겨 있으며, 한 여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다룬 ‘돈 줄리오의 비극’은 작가의 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에서 일부 다뤘던 내용을 다시 쓴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진실한 사랑을 갈망하고 질투에 불타오르며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고 욕정에 휩싸여 불륜에 빠진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다시 한번 인간의 보편적 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기를 발휘한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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