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휴대전화 가진 사람 존경스럽소

  • 입력 2003년 4월 30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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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폭발하고야 말 것 같다. 이 짜증스러운 휴대전화가 내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그날, 정확히 4월 2일 오후 1시, 서울발 경부선 새마을 열차 특실, 저쪽 앞자리 그 여자의 휴대전화 통화는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족히 15분을 떠들어댔다. 상당히 떨어진 뒤쪽 내 좌석까지 들렸으니 온 기차 안이 피해권이었다.

막 점심을 끝내고 모두들 낮잠 들 무렵이었으니 그 짜증이 더 했으리라. 한데도 누구 한 사람 불평이 없다. 급한 원고를 다듬느라 머리가 복잡한데 그 여자의 금속성 굉음이 계속 내 생각을 흐트러뜨리곤 했다. “아휴, 저걸 당장….” 거의 폭발 일보 직전, 드디어 열차 직원이 옆으로 지나갔다. “이봐요!” 깜짝 놀란 건 지나가던 직원만이 아니었다. 모든 손님이 내 쪽을 돌아봤다. 하긴 내 고함소리에 나도 놀랐다. “저 앞에 여자….” 내가 설명도 하기 전에 근처 사람들이 앞 쪽을 손가락질하며 성토를 했다.

▼쉼터서…일터서…울려대는 ‘짜증’▼

후유! 안심이 되긴 했지만 순간 난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던 게 부끄러웠다.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다. 문제의 여인은 밖으로 쫓겨나고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기분은 영 찜찜하다. 모두들 그렇게 짜증이 났으면서 왜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우린 왜 자기 권리 주장에 이렇게 주저할까, 자칫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남이야 어떻든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위인치고 고분고분한 사람 없으니까. 그래서 참을 수밖에 없다. 조급한 성격의 한국인으로선 대단한 인내심이다. 하지만 그러다 폭발이라도 한다면 큰 싸움판이 벌어질 수도 있다. ‘휴대전화 살인’이 나지 말란 법도 없다. 공중전화 오래 쓴다고 기다리다 못해 살인극까지 일어난 관록이 우리에겐 있지 않던가.

중요한 회의 때도 벨이 울린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것인지 확인하느라 가방을 뒤지는 모습은 가관이다. 도대체 이런 자세로 무슨 회의를 하겠다는 건지 한심하다. 전화 주인공이 “미안합니다”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가려 조용히 통화하지만 일단 회의는 중단이다. 그뿐인가. 사람들은 겨우 들리는 듯한 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안 된다. 통화가 겨우 끝나 회의가 재개되지만 아까와 같은 흐름이 전혀 아니다. 분위기부터 썰렁하고, 샘솟던 아이디어도 그만 얼어붙는다. 직업상 난 이런 황당한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분위기가 한창 고조된 강연장에서 갑자기 벨이 울리면 이건 아주 결정타다. 청중은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고, 순간 강연장엔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영 맥이 빠진다. 다시 분위기를 잡기까진 한참이 걸린다.

▼참다 폭발해 ‘큰 일’ 날까 걱정 ▼

공연장, 비행기 안에서도 마찬가지고 내 진료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서럽게 목메어 울던 환자의 벨이 울린다. 전화기를 꺼내 들더니 만면에 웃음을 짓는다. 너무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서럽게 울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어쨌거나 그의 통화가 끝날 때까지 멍청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윽고 통화가 끝나면 그는 다시 울기 시작한다. 마치 수도꼭지 틀듯 감정 조절이 자유자재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 그 후 난 환자가 무슨 이야길 하건 잘 경청할 수 없다. “아까 그 사람한테 전화 한 번 더 하시죠?” “네?” 어이가 없는지 환자도 웃는다.

몇 해 전 나도 휴대전화를 가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게 영 할 짓이 아니었다. 이건 아주 폭력이었다. 벨이 울리는 순간, 깜짝 놀라는 건 그렇다 치고 내 생각을 막무가내로 방해한다. 내 사고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내 자율성을 속박해 마치 결박이나 당한 듯 거북했다. 이런 걸 다 감수하고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는 사람이 마냥 존경스럽다. 표창을 하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이 이야길 길게 쓰는 건 ‘휴대전화 소지 자격증 제도’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살인이 나기 전에.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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