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50년고통 녹아있는 참기름 한병

  • 입력 2002년 8월 29일 18시 55분


대구 북구의 작은 아파트. 지난 50여년간 은둔 아닌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던, 칠순이 훌쩍 넘은 노인이 산다.

최광섭(76)씨. 그는 ‘최승희의 유일한 혈육’이지만 ‘월북자 가족’이라는 업보를 안고 살 수 밖에 없었다. 1950년 교사생활을 시작해 1993년 문경공고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10여개 학교로 옮겨다녀야 했다. 최승희의 조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동네 사람들을 통해 언젠가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 제자로부터 “행동 조심하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는 최근 기자에게 가슴에 묻어둔 사연을 털어놓은 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했다(본보 8월 29일자 A 21면 보도).

“최근 고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공산주의자’라는 오해를 풀게 됐습니다. 이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됐네요. ‘최승희 박물관’이 세워지는 날을 보는 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최씨는 백내장 수술을 받은 눈이 상태가 악화돼 요즘 돋보기로 들여다봐야만 간신히 사물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는 상태. 하지만 기자가 동아일보에 실렸던 최승희의 1967년 당시 사진을 건네자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모도 많이 늙었구먼”이라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그의 뇌리에는 젊은 시절의 고모 최승희가 장고를 두드리며 춤추는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듯 했다.

최씨와 부인 오승희(72)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기자에게 “누추한 곳까지 와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불쑥 토종 참깨로 짠 참기름 한 병을 기자에게 건넸다.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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