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빗소리 벗삼아 밥장떡에 술한잔

  • 입력 2002년 7월 11일 16시 17분


사진=전영한기자
사진=전영한기자
유월에 지나려나했던 장마가 달을 넘겼다. 일년간의 네 계절을 한곡의 노래라 한다면 장마는 가사 없이도 끈적한 매력이 흐르는 간주정도가 되려나? 여하튼 찹찹하니 부드러운 양모이불마냥 대지에 깔리는 빗소리는 그날그날이 엇비슷한 일상에 여러가지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우선 필자와 같은 애주가는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이 얼큰한 국물에 소주 한잔 안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비가 와서’ 보고싶은 연인들은 ‘비 때문에’ 헤어지기가 더 아쉬운 법이니 말이다. 월드컵 이후 ‘일탈’의 빌미를 잃은 이들은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오늘 소개하는 요리 한 접시에 술 한잔 걸친들, 또 그 한 잔에 옛애인 생각이 난들 누가 탓하랴. “비가 와서…”라는 멋들어진 변명이 붙는데 말이다.

필자가 외국에서 자취하던 시절엔 늘 밥솥에 밥이 많이 남곤했다. 찬밥을 모아서 이래저래 활용하던 메뉴 중 비오는 날이면 부쳐먹던 요리가 ‘밥장떡’. 찬밥에 달걀을 풀어 부드럽게 만들고 케첩과 고추장으로 기호에 맞게 양념을 한 후 한큰술씩 떠서 바짝바짝 지져내면 완성되는데, 기호에 맞게 조절하는 들큰한 케첩과 칼칼한 고추장 맛에 모든 이들이 좋아하던 메뉴다. 얇게 부치면 누룽지처럼 아작아작 씹는 맛이 좋고, 도톰히 부치면 열무김치만 곁들여도 든든한 식사거리가 된다. 사실 빗소리가 안주되어 취흥이 오르면 잘 끓인 국물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주안상이 될 수 있는데, ‘밥장떡’과도 부드럽게 매치되는 ‘홍합국물’은 어떨까?

흥미롭게도 이 조리법은 프랑스에서 배운 것인데, 한국의 포장마차에서 주는 ‘서비스 국물’과 흡사하여 놀랐던 기억이 난다.

조리법은 간단한데, 우선 잘게 다진 양파와 마늘을 뜨겁게 볶다가 홍합을 넣고는 뚜껑을 닫는다. 친근한 마늘내와 달큰한 양파향이 배인 수증기에 홍합 껍데기가 살살 열리는데 이때 뚜껑을 열고 붓는 약간의 백포도주가 포인트! 홍합의 비린내를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포도주 특유의 산미가 미세한 맛의 차이를 만든다. 여기에 물을 붓고 맑게 끓이면 소금간을 하고 파를 썰어 띄우는데, 특히 차가운 백포도주나 맥주와 잘 어울린다.

국물이 끓은 후 소금간을 생략하고 홍합을 건진 뒤 국물 없이 그릇에 담고, 냄비에 남은 맑은 국물에 라면을 끓이면 그도 비오는 날에 어울리는 별미다. 조개향으로 밑간이 밴 얼큰한 국물은 감칠맛이 나고, 여기에 보너스로 잔새우나 오징어를 가미하면 ‘푸짐한 탕’이 된다.

‘비’를 빌미로 벌어지는 스토리의 진수는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가 아닐지? 어린시절 교과서 안에서 처음 접했던 소설 ‘소나기’는 빗소리와 엮어서 펼쳐지는 장면장면의 묘사가 어찌나 선명했던지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도 비만 오면 주인공인 소년, 소녀가 비를 피하려 앉아있던 볏단 속의 습한 열기가 느껴진다. 소설 속 등장하는 작은 먹을거리는 두가지가 있는데, 소녀가 소년에게 건네는 알이 굵은 대추와 소년이 소녀에게 주려 호주머니에서 조몰락대던 호두. 늦여름 따버린 대추의 풋내섞인 달콤함이 소녀의 마음인지, 우직한 껍데기 속 감추어진 호두의 아릿함이 소년의 풋사랑(병을 앓다 죽게 되는 소녀에게 결국 호두를 건네주지 못한다)인지는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호두가 콕콕 박힌 양갱에 시원한 대추차로 오늘의 식탁을 마무리하겠다.

팥소와 설탕을 불 위에 올려 녹이고 한천과 섞어서 호두를 넣고 굳히는데, 여기에 생크림을 조금 섞으면 푸딩처럼 부드러운 뒷맛을 만든다. 양갱이 굳는 동안 대추 몇 알을 발그레하니 달여서 꿀이나 시럽으로 맛을 내면 더위에 지친 내장기관을 다스리는 음료가 된다. 부드러운 호두 양갱 한입에 시원하게 식힌 대추차를 마시며 장떡과 국물안주로 은근히 올렸던 취기를 차분히 마무리하자.

풍류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바람불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멋일 게다. 시간과 사계절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나이가 들어가는 아쉬움도 헛헛 웃음에, 한잔술에 섞어 마실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주사 한 대로 눈가의 주름도 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지만,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과학이 이쯤에서 멈추었으면 하고 바보처럼 바라본다. 바람이, 물이 흐른들 세상모두가 젊은 얼굴 일색이라면 납량 특집극이 따로 없을 것이니 말이다.

달걀 홍합 식은밥과 약간의 양념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조리가 가능하다 [사진=전영한기자]

●밥장떡●

◇재료〓밥 한공기, 달걀 1개, 소금, 후추, 고추장 1/2큰술, 케첩 1/2큰술, 설탕 약간, 파슬리 약간, 식용유

만드는 법

①달걀을 풀어서 찬밥 한공기와 섞는다.

②①에 고추장, 케첩을 비벼서 섞은 후 설탕, 소금, 후추로 간을 맞춘다.

③식용유를 팬에 달구어 ②를 바짝 지지고 파슬리를 다져서 뿌린다.

●홍합국물●

◇재료〓홍합500g, 양파 1/2개, 식용유 약간, 다진마늘 1작은술, 화이트와인 1/3∼1/2컵(기호에 따라), 물(생수) 3∼4컵, 파 약간, 소금, 후추

◇만드는 법

①깊이가 있는 냄비에 약간의 식용유를 달구어 마늘과 다진 양파를 볶는다.

②양파가 투명하게 익으면 깨끗이 손질해 둔 홍합을 넣고 뚜껑을 덮은 채 3∼5분 둔다.

③홍합의 껍데기가 모두 열리면 화이트와인을 붓고, 알코올이 조금 증발하면 물을 붓고 끓인다.

④홍합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면 소금, 후추로 간을 맞추고 파를 썰어 넣는다(프랑스식을 원하면 파 대신 파슬리나 허브를 다져 넣는다).

●양갱●

◇재료〓팥소 300g, 설탕50g, 소금 약간, 한천 3∼4g, 물 200cc, 생크림 20㏄, 호두

◇만드는 법

①팥소, 소금, 설탕을 한 냄비에 넣고 불에 올려 저어가며 녹인다.

②한천에 물을 부어 끓인다.

③②에①을 조금씩 부어가며 섞는다.

④③을 조금 끓인 후 불에서 내려 생크림과 호두를 섞는다.

⑤사각용기에 넣고 굳힌다.

▼남산골 빗길은 맛길▼

서울 한복판의 남산에 가면 비오는 날의 정취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빗줄기가 굵지 않다면 한가로운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 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된다.

모처럼 연인끼리 나선 길이라면 하얏트호텔의 야외카페 ‘테라스’(02-799-8166)를 적극 권한다.

칵테일 한 잔 가격치곤 고가의 메뉴이지만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국적인 분위기는 제 값을 한다. 새벽 2시까지 문을 열기 때문에 저녁 산책 후에 들러도 좋을 듯.

하얏트호텔을 돌아서서 외인주택으로 향한 내리막길을 조금 걸으면 보이는 작은 간판의 ‘비손’(02-790-0479)도 비오는 날 좋다.

한국인의 입맛에 낯설지 않은 가벼운 프랑스 음식을 요리하는 앤티크한 분위기로 가족끼리, 친구끼리 찾기 좋다.

저녁마다 어쿠스틱 기타연주를 라이브로 들려주고 작지만 확 트인 창가는 한가롭다.

국립극장을 끼고 장충동쪽으로 걸어 내려왔다면 역사가 긴 ‘평양면옥’(02-2267-7784)에서 제육 한접시 어떨까?

오랜 역사만큼 이북 출신의 단골들이 비오는 날 모여들어 냉면국물에, 깔끔한 제육에 소주 한 잔하는 곳이다.

박재은(파티플래너·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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