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사관 직원숙소 신축 강행…덕수궁 경관훼손 논란

  • 입력 2002년 7월 4일 18시 32분


주한 미국대사관이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부근에 미 대사관 건물과 직원 숙소용 아파트를 신축하려는 것을 놓고 문화유적 및 문화재 경관 훼손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문화계에선 지난해에도 덕수궁 인근의 캐나다 대사관 신축 허가를 둘러싸고 한바탕 홍역을 치뤘었다.

그런데도 주한 미대사관은 4일 미 대사관 건물과 직원용 아파트 설계를 맡은 미국의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68)를 초청, 기자회견을 갖고 설계방향을 설명하는 등 대사관 신축 강행 의지를 분명히 했다.

미 대사관측이 대사관저 내에 추진 중인 직원용 아파트는 8층에 54가구 규모이고 옛 경기여고 자리에 세울 계획인 대사관 건물은 지하 2층, 지상 15층짜리다. 대사관저와 숙소용 아파트, 대사관을 묶어 미국 외교공관타운을 형성한다는 계획이다. 아직 착공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고 완공 예정 시기는 2008년.

대사관 건물의 경우, 주차장법과 서울시 조례 등을 적용하면 529대분의 주차면적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미 대사관측은 그만큼 면적이 필요없다며 서울시와 건설교통부 등에 관련 법규의 예외 적용을 요구했다.

또한 현행법은 20가구 이상의 모든 공동주택은 공개청약을 통해 일반 분양토록 규정하고 있고 주차장, 어린이 놀이터 같은 부대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미 대사관측은 직원용 아파트는 일반 공동주택이 아니라 외교관 시설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놓고 문화재 전문가들과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거세다. 첫째 이유는 문화 유적 파괴 및 문화재 경관 훼손. 신축 부지가 원래 덕수궁 터였기 때문에 이곳에 건물을 짓는 것은 유적 파괴를 초래한다는 주장이다. 서울시의 관계자 역시 “해당 부지가 옛 덕수궁 터인 만큼 유물이나 유적 등의 유무를 먼저 확인한 뒤 허가 여부를 결정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발굴 기관이 대부분 발굴을 거부하고 있다. 국내 고고학자들이 대부분 미국 대사관 신축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발굴이 이뤄지지 않으면 건물을 신축할 수 없다.

아울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문화개혁시민연대 등은 “주둔국의 문화재를 짓밟고 대규모 복합 외교공관단지를 조성하겠다는 미국의 발상과 이를 위해 주둔국의 관련법을 바꾸라는 요구는 부당한 주권 침해행위”라고 비판하고 ”미 대사관은 덕수궁 인근이 아니라 제3의 장소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논란이 계속되자 서울시와 건교부도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는 문화재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덕수궁 인근 캐나다 대사관 신축 부지의 용도 변경을 허가해 9층짜리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美 공관타운 설계 맡은 그레이브스

주한 미국 대사관 건물과 직원 숙소용 아파트 설계를 맡은 미국의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68·사진)는 4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로 건축될 대사관과 직원용 아파트는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시내티대와 하버드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레이브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포스트 포더니즘 건축가. 1982년 오리건주 포틀랜드시 청사인 포틀랜드 빌딩을 설계해 미국 건축계를 놀라게 하면서 도시 건축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현재 프린스턴과 뉴욕에서 건축 설계 및 디자인 사무소인 ‘마이클 그레이브스 앤 어소시에츠’를 운영하고 있다. 경기 용인시 레이크 힐스 컨트리클럽의 클럽하우스를 설계하기도 한 그레이브스가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12번째다.

-미국 대사관 신축 예정 부지인 옛 경기여고 자리는 원래 덕수궁 터다. 그리고 제사를 지냈던 건물인 선원전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대사관을 짓는 것이 문화유적을 훼손하고 문화재 경관을 해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 지역에 문화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우리는 13명의 한국 고고학자에게 사전 발굴을 요청했다. 그러나 모두 거절했다. 놀랍다. 우리도 곤란한 형편이다.”

-미국 대사관과 직원 숙소 설계의 컨셉은.

“나의 건축은 주변의 역사 문화 환경를 중시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대사관을 지을 곳엔 덕수궁이 있고 돌담길이 있다. 그 역사 경관을 살릴 것이다. 인근에 고층 건물과 녹지도 많다. 녹지를 살려 정원을 많이 꾸밀 생각이다. 구조나 분위기는 물론 건축 재료도 주변과 어울리게 할 것이다. 또한 대사관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둘 것이다. 그래서 비자를 발급받는 한국인을 위해 대사관 입구에 마당도 만들고 거기에 한미 양국의 예술품도 설치할 생각이다.”

-경관 보호의 측면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북쪽 신문로 도로변엔 20층 정도의 고층 건물들이 있다. 대사관은 그 바로 남쪽인데 15층 정도로 할 것이다. 다시 그 남쪽의 직원 숙소는 8층으로 한다. 덕수궁으로 가까워질수록 건물이 낮아짐으로써 덕수궁 전망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동양과 서양 분위기의 조화를 이루어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외교적 교량이 되도록 하고 싶다.”

-설계는 언제 시작되고 언제 마무리되는가.

“현재 대사관 직원용 아파트는 세부 설계까지 끝났다. 그러나 대사관은 기본 방향만 잡혔고 설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직원 아파트가 착공되면 그때 대사관 건물 설계에 들어갈 것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으로 설계한다는 말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외관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

-서울의 건축에 대한 인상은.

“서울은 고층 건물이 다닥 다닥 붙어있다. 서울의 전통과 문화를 소홀히하고 너무 일하는 곳으로만 생각한 결과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서울에 녹지가 많고 사람들이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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