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투병문학상 선정 수기 전문

  • 입력 2002년 5월 26일 19시 07분


꿈꾸는 자의 희망

(부제: 枯葉)

꿈꾸는 자에겐

희망이 있다.

노력을 하면

죽을 각오로 노력을 하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할 수 있다.

인생사 새옹ㅈ마라 하지만

운명은

개척하는 자의 몫이다.

손가락에 펜을 묶어서 -2000년 4월에-

1970년 삼월 하순. 월남에서 20개월간 정글을 헤매다 돌아온 나는 전역과 동시에 부산에 있는 금형 제작 및 금속 가공 공자에 취직하여 사회 초년병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귓청을 때리고 가던 포성과는 달리 유압 프레스, 밀링, 선반, 사출기 등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희망으로 향하는 심장의 고동소리 같았고, 기름 냄새도 아카시아 향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다.

영업일을 맡아서 거래처를 관리하고 개척하는 사이 훌쩍 이태가 지나갔고, 철로변의 사글세방에서였지만 아내를 맞아서 행복을 설계해 나갔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돌아가던 1972년의 어느 늦여름날 오후, 한 떼의 사람들이 공장 사무실로 쳐들어오더니 “사장놈 내놓으라”고 점령군처럼 행패를 부렸다. 사람 속을 모른다더니 점잖아 보이던 사장이 도박과 주색으로 호박씨 깔 줄 짐작이나 했으랴. 공장은 물론 그의 재산은 채권자들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사십여 명의 직원들은 졸지에 직장을 잃게 되었다.

멈추어선 기계를 보며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채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를 죽음의 땅에서 돌아온 나를 믿고 채무를 2년만 유예해 달라고, 그리고 공장장을 비롯한 직원들에겐 한마음으로 뭉쳐서 남이 아닌 우리의 직장을 살려내자고.

그렇게 끈질긴 호소와 무모한 뱃장 하나로 기계들을 재가동하면서 생산라인을 개선하며 불량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한편, 아예 사무실을 개조하여 살림집으로 겸용했다.

밤낮이 따로 없이 일에만 매달렸지만 사소한 안전사고가 생기고 자금난에 봉착하는 등 수시로 어려움이 밀려왔지만, 정글과 험산을 야생마처럼 달리며 귀신같이 접근해서 번개처럼 치고, 연기처럼 사라지면서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신념으로 살아남았던 특공대 시절을 거울삼아 이겨 내었다.

모두가 한마음 되어 각고의 노력 속에서 땀 흘린지 6년. 채무 청산은 물론이고 노후시설의 교체에 직원들도 배나 불어났다.

“참, 대단한 사람이야” 주위의 부러움을 살만큼 사세가 확장되어 가자, 공장 근처에다 집을 구해 먼지와 소음이 친구가 되어버린 아이와 아내를 이사시켰다. 그제서야 비로소 긴장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며, 직원들의 복지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심술궂고도 시기심이 많은 놈이 운명이었다.

공휴일인데도 주문량을 맞추려 출근한 1978년 10월3일, 가을날답지 않게 하늘이 잔뜩 찌푸린 잿빛으로 내려앉아서 금새라도 후두둑 비를 뿌릴 것 같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직원들을 격려하고 구석구석 돌아본 후 사무실로 향하는데,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에서 불이 번쩍이더니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통증이 오면서 아득한 벼랑으로 떨어져 가듯 의식이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는 메리놀병원 정신신경과에서 다음날에야 깨어났다. 대형 링거병에서 노오란 수액이 혈관으로 흘러들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사물이 분명하지가 않고 초점이 흐려만 져갔다. 근심에 젖어있던 아내가 별일 없을 거라고 했으나, 회진차 들른 의사는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혀와 맥박, 심장 체크 등을 한 후 본격적인 검사를 시켰다.

소변검사, 혈액검사 등 기본적인 병리검사에서 X선, CT 촬영과 심전도, 근전도 등 당시로서는 첨단장비가 망라된 많은 검사를 했다. 그러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몸은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엔 미친 듯한 가려움증이 전신을 휩쓸었고, 다음엔 전류가 흐르는 듯 찌릿찌릿 저려왔으며, 이내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뿐만 아니었다. 호흡이 가빠졌고, 몸통은 경련을 시작했고, 시계추처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의사는 X선 필름을 본 후, 요추부에 이물질이 십여개 있다며 나를 보았다. 월남에서 파편상을 입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이해가 되는 듯 고개를 끄떡였으나, 근본적인 병인은 더 지켜보아야 알겠다며 무척 곤혹스러워 했다.

그리고 증세에 따라 신경외과, 피부과, 재활과, 내과의 진료도 병행되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악화만 되어가서, 나는 결국 머리, 가슴, 배를 밴드로 침대에 묶고, 진정제로 급한 경련의 불을 끄곤 했으나 약 기운이 떨어지면 마찬가지였고, 아내의 시름은 깊어갔다.

의사들은 복합적인 나의 증상들이 왜 그런지 계속 관찰하고 이런저런 처방을 했지만, 병실 앞 나무들이 옷을 두 번이나 갈아입어도 루비콘강을 건너려는 듯 의식마저 놓아버린 나의 영혼을 깨우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는 친척집을 떠도는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청춘을 다 바친 공장도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산사람이나 살아야조.” 의사는 그렇게 손을 들어 버렸지만, 아내는 그냥 포기할 수가 없어 살림집마저 팔아 서울로 향했다. 더 크고 유명한 병원을 찾아서!

세간에 알려진 일류의 병원, 한의원도 무정하게 실망만 안겨 주었다. 기도원, 산사에도 가 보았다 용하다는 점쟁이의 비방과 무당의 굿거리도, 도사의 단방약도, 흡열귀처럼 돈만 빨아먹을 뿐이었다.

결국은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모든 걸 체념하고 낙향을 했다. 슬픈 아내의 마음을 짐작하듯 하늘을 추적추적 초겨울의 세우(細雨)를 부렸다. 북망길이 가까운 선산 밑의 폐가는 금새라도 무너져 내릴 듯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별빛이 새어 들고, 바람도 지나 다녔다.

다얄강변(다얄강; 월남 남부 작전지역에 있던 강)의 망그로브나무(망그로브; 강변에 뿌리를 드러낸 나무) 뿌리처럼 얽히고설킨 거미줄을 걷어내면서, 자신의 기구한 팔자와 병든 나를 저주하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오래 동안 꾹꾹 눌러서 참아온 설움을 폭발시키며 밤새도록 꺽꺽 울었다.

그러나 어쩌리오. 원수 같지만 숨이 붙어 있으니 버릴 수도 없고, 눈에 밟히는 자식새끼 불쌍하고... 일시적이었지만 흐트러진 마음을 채찍질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호구를 해결하면서 산골에서만 오래 산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몸에 좋은 약초가 어떤 것인지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산속을 드나들고, 된장 등 전래의 방법으로 진물 흐르는 피부에 찜질을 하면서 끝까지 내 생명의 불씨를 놓지 않았다.

모질고 무정한 세월은 아내의 이마에다 깊고 굵은 인고의 주름살을 새기면서 고난 중에서도 속절없이 흘러갔다. 시간을 건너 뛴 듯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버린 아이가 돌아왔고, 1980년대가 저물면서 사립 밖 늙은 은행나무에 1990년의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도 생명이지만 질기고 질긴 것도 생명이었다. 구찌동굴(구찌동굴; 하노이에서 사이공까지 월맹군이 판 340km의 땅굴) 보다 깊은 암흑 속에서 해부학교실의 표본처럼,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 놓고, 무려 열두해나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내가,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 소리에 이끌려 살며시 눈을 떴다.

전장을 울리던 포성같이 다가와서 나의 의식을 불러낸 그 소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지쳐버린 아내가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였다 소독냄새에 절었던 병원의 기억이 잠시 스쳐갔으나, 토굴 같은 집과 세월보다 훨씬 겉늙어 버린 아내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주검보다 서럽고 아픈 세월을 살아온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얼굴만 제외한 마비된 육신과 눈에 들어온 현실은 무엇이던 집어 삼켰던 송지앙(송지앙; 월남 남부 영마호수로 흘러드는 강) 갈대숲의 늪을 연상시켰다. 숨 막힐 듯한 고요가 계속되자, 이불로 나를 싼 아내는 햇살 한조각 새어드는 마루에 뉘이고 담장 밑을 가리켰다.

거기엔 언 땅을 헤집고 올라온 민들레 한 송이가 배시시 웃고 있었고, 나비 한 쌍도 정답게 날고 있었다. 은연 중에 생명의 소중함, 신비로움을 각성시켜 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귀를 간질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보, 당신이 살아만 있어도 우린 행복할 수 있어요. 고난의 땅에 피는 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꼭 올 거예요.” 그리고는 부엌으로 약초즙을 들고 나와서 마시게 했다. 나는 그 쓰디쓴 약에다 아내의 정성, 눈꼬리에 매달려 있는 눈물 한방울도 함께 마셨다. 빗발치던 탄우 속에서 부상을 당해가면서 지그재그로 사선(斜線)을 달려 동료를 구출해 내었던 나는 특공조장 아니었던가!

“그래, 아내의 말대로 좋은 시절이 올지도 몰라, 아니 오도록 만드는 거야,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억울해!”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아이와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개구리가 뒤집듯 유일하게 움직여지는 머리를 지렛대 삼아, 팔과 다리의 굳어진 관절을 꺾고 펴며, 허리를 들어올려 몸의 유연성을 기르면서, 통나무 굴리듯 굴리게 했다. 그러나 굳어버렸던 관절이 풀리는 아픔이 너무도 커서 상처 입은 맹수처럼, “우우우” 하며 울부짖었고, 아이와 아내는 피부가 벗겨져 방바닥이 피로 물드는 것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고통뿐인 현실을 벗어나는 길은 순식간에 생사가 교차되던 전선에서와 같이 더 대담하고 꺾이지 않는 불굴의 용기가 필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치마가 부셔져 나가도록 사투하며, 다음해 여름이 왔을 땐, 중풍에 걸린 환자처럼 자폐증 아이들처럼 팔다리를 허우적대면서 가까스로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내친김에 대들보에 줄을 매게 하여 일어서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오뚜기인 양, 반복하면서 힘을 길러 갔다. 사람들은 모르리라.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화장실에 가서 스스로 배설하고 뒤처리를 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가를!

뒤뚱거리며 넘어질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나마 집안을 다닐 수 있게 되자, 아이와 아내를 내왕하기가 쉬운 인근의 도시로 내 보냈다. 아이의 교육과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은행잎이 뒹굴며 외로움이 쌓여갔고, 나는 마당에 퍼지고 앉아 한손으로 목덜미를 잡아서 몸의 중심을 잡고 다른 손에다 호미를 묶어서 하루에 한두 뼘씩 땅을 파 가을이 끝날 무렵엔 예닐곱 평의 채마밭을 일구어 내었다.

그리고 겨우내 목발이 부러져 나가고 크러치가 휘어지도록 걷기 연습을 하여 다시 계절이 바뀌었을 땐 윗산 선영까지 갈 수가 있었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며 1992년의 봄이 절정으로 치닫던 사월 어느날, 그날도 나는 사지를 깃발처럼 휘저으며 산책에서 돌아와 식은 밥을 한술 뜨고 9시 TV 뉴스를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TV의 화면을 가득 메울 정기가 빠져버린 군상들. 찌그러지고 뒤틀리고, 썩어가고... 해골같이 말라버린 모습들! 그 속에 바로 내가 있었고 그들은 모두가 월남 참전용사였으며, 아나운서는 고엽제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원시림 깊숙이 숨어서 뒤통수를 치고 도망치는 검은 곳의 유령 같은 게릴라들! 정글은 그들에게 천혜의 은신처였다. 그 은신처를 제거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미국은 고엽제라는 화학무기를 살포하여 정글을 고사시켰다.

그 고엽제가 직간접으로 인체에 들어와 있다가 5~10년의 잠복기간을 거친 후 죽음의 사신이 되어 돌아올 줄을 모른채, 고엽제가 녹아있던 개울물을 마셨고, 독충들을 물리치려 바르기도 했다.

그런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하고 분노케 한 것은 종전 후 고엽제의 독성을 알게 된 미국은 3년에 걸쳐 역학조사(젠킨스 보고서)를 실시했고, 각 참전국에 사실을 통보한 후, 비전투원을 파병한 나라까지 예상 피해자를 10분의 1로 보고, 치료와 생계를 위한 보상을(2억 4천만불) 80년대 초에 실시했는데 당시의 정부는 이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 차단 시켰으며, 다음 정권도 숨겨 버렸기에, 참전용사들은 팔자타령만 하면서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방의 자유수호, 국가 경제의 부흥이라는 참전용사들의 자존심을 한낱 총알받이 소모품으로 전락시켜 버린 꼴이었느니, 나라의 명령에 의해 수륙만리 낯선 땅에 가서 청춘을 바치고, 피 흘린 대가가 고작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냐고 용사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마지 못해서 당국은 피해자 신고를 받았다.

저마다 공신력을 높이려 3차 진료기관의 진단서와 신원증명의 서류를 제출하고 육개월이나 기다린 후에 검사를 받았는데 한꺼번에 수백 명씩 몰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고엽제가 유발시키는 질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던 의사들은 당국의 지침인 “비호지킨 임파선암, 연조직 육종암, 말초 신경병, 염소성 여드름”의 네가지 이외에 무조건 탈락시켰는데 99.9%가 해당되어 또 다른 원성이 시작되어다. 나는 심사하던 의사들이 춤추는 용사,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 부를 만큼 복합적인 질병으로 ‘양상지나 양하지 절단, 양안 실명’과 같은 1급 증상이의 판정을 받았다. 말초 신경병, 비골 중추 신경염, 근위축, 불수의 운동, 다발성 신경마비, 다발성 골수종, 류마티스 관절염, 폐기종, 고지혈증, 재발성 연골염, 지루성 피부염, 백선....

1992년 10월 12일, 드디어 보훈지청에서 국가유공자 증서를 교부받고는 머리맡에 고엽이란 글을 써 붙이고는 마음을 새롭게 했다.

고엽(枯葉)

하늘을 무척 보고 싶었다.

땅을 한번만 밟아보고 싶었다.

화장실만 갈 수 있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암울했던

지난 시절을 잊지 말고

이 목숨 다하도록

소외된 이웃과 더불어 살자.

그리하여 나는 당장 중증이면서 탈락한 전우 몇을 수소문하여 연금을 쪼개 매월 40만원을 후원하고 중앙 일간지에다 고엽제 환자의 비참한 생활을 알리면서 수혜 폭을 늘리라는 투고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재활운동 삼아서 선영 아래의 비탈진 땅 300여 평을 개간하여 유실수를 심었다. 병신이 꼴값한다고 사람들이 비아냥 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고, 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절망의 벼랑 끝에서 돌아왔고, 고엽제 법안과 개정을 거치면서(후유증 12가지, 후유의증 21가지) 범위가 확대되어 탈락자들이 거의 구제되었다.

나의 후원금은 영아원과 보육원, 양로원으로 대상을 바꾸었고, 병신이지만 부끄럽지 않은 아비, 남편이 되려고 나는 끊임없이 노력을 했다.

그러한 나의 삶의 인간승리라며, 국방부는 영화로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였고(1994년), 1995년과 1996년에의 현충일, 국군의 날을 전후하여 KBS TV와 위성방송으로 전국에 방영했다.(제목; 내일은 푸른 하늘)

MBC와 KBS도 휴면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영했으며(제목; 마른 잎 다시 살아나 / 사랑의 가족), 본의는 아니지만 고엽제가 상처뿐인 전리품으로 유명해져서 군, 경찰, 교정기관, 관공서, 전우회, 사회단체 등에 강사로 초청되기도 한다.

물론 보행과 섭생, 배설 등 모든 것이 불편하고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보람이 있고 마음은 즐겁다. 어느날 불행이란 놈이 불쑥 찾아와 나는 물론 가족을 끊임없이 절망케 했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기에 오늘 이렇게 보람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끝으로 이 시간도 삶이 주검보다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환우들이 있겠지만 검증된 방법(의사의 도움)에 자신의 강력한 의지로 승리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엮어가기를 빈다.

허만선

▼고엽제(枯葉濟. AGENT ORANGE)

시계 청소용(정글 枯死)으로 다이옥신, 비소 등 맹독성 물질이 포함된 화학무기.

같은 질량일 때 청산가리보다 천배 이상의 독성.

같은 질량일 때 근사미보다 만배 이상의 독성.

작전시 피부, 음용수 등의 직접 또는 호흡으로 간접 흡입되어 인체에 축적, 배출 안 되고 불치병 유발.

2세 기형 등 유전

1961~1972년 사이 170ha(교전지역)에 9,100만kg 살포. 전세계 인류 몰살하고도 남을 양.

1967~1970년 구정 공세를 전후로 집중 살포. 이때 파병 작전에 투입된 병사들이 고엽제 환자의 8~9%

한국군 1964~1973년 32만여명 파병되었음.

2002년 1월 31일 현재 등록된 고엽제 환자.

(1)후유증 환자 4,709명

(2)후유증으로 의심되는 후유의증 환자 45,522명

(3)2세 환자. 약간명(30명 미만-실제 1,000여명으로 추정).

결혼 등 자녀의 장래에 불이익을 초래할까 싶어 대부분 신고 기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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