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門 前 成 市(문전성시)

  • 입력 2002년 5월 7일 17시 39분


門 前 成 市(문전성시)

戚-겨레 척 耽-즐길 탐 溺-빠질 닉 諂-아첨할 첨 詰-꾸짖을 힐 剝-찢을 박

‘門前成市’는 ‘방문객이 워낙 많아 문 앞에 마치 시장이 선 것과 같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權力(권력)을 쥐고 있는 자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西漢(서한·BC 206-AD 8)의 哀帝(애제)는 정치를 外戚(외척)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女色(여색)에만 耽溺(탐닉)했다. 충신 鄭崇(정숭)이 수차 간했지만 도무지 듣지 않았다. 그래도 자꾸만 간하자 오히려 鄭崇을 멀리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鄭崇은 寵愛(총애)는커녕 잔뜩 疑心(의심)만 받게 되었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되어 이 기회에 아예 辭職(사직)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後患(후환)이 두려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전제군주시대에는 자신의 去就(거취)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趙昌(조창)은 奸臣(간신)으로 阿諂(아첨)과 謀陷(모함)의 명수였다. 鄭崇이 哀帝로부터 疏遠(소원)당하고 있다는 것을 매우 고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哀帝에게 鄭崇을 謀陷하는 말을 했다.

“녀석은 참으로 奸邪(간사)한 놈입니다. 혹시 다른 뜻을 품고 있을 지 모르므로 注意(주의)하셔야 합니다. 빨리 무슨 措置(조치)를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哀帝는 즉시 鄭崇을 불러 들였다.

“듣건데 卿(경)의 門前은 저자와 같다며?”

그것은 實勢로 행동하여 阿諂하는 무리가 많다는 詰責性(힐책성) 警告(경고)였다. 물론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鄭崇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臣의 大門 앞에는 阿諂하는 무리들로 저자처럼 되어 있습니다만 臣의 마음은 물과 같이 깨끗합니다”(臣門如市, 臣心如水)라고 한 뒤 한 마디 덧붙였다.

“황공하오나 진상 파악을 위해 한 번 조사를 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감히 天子에게 대든 꼴이 되고 말았다. 과연 이 말에 哀帝는 怒發大發(노발대발)하여 鄭崇을 下獄(하옥)시키고 말았다. 많은 신하들이 그를 위해 변호했지만 오히려 관직만 剝脫(박탈)당하고 쫓겨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鄭崇은 끝내 獄死(옥사)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門前成市’는 좋은 뜻이 아닌 것 같다. 흔히 ‘門前成市를 이룬다’는 표현을 하는데 ‘역전 앞’, ‘처가 집’처럼 옳은 표현이 아니다. ‘門前成市’라는 말 자체가 시장을 ‘이루었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門前成市였다’고 하든지 아니면 ‘門前成市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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