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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4월 3일 1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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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식 ‘예술제본장정’을 국내에 도입한 백순덕씨(39)가 장정한 책에서는 여느 책과 달리 ‘예술품’의 향취가 풍긴다. 원래의 책 표지를 떼내고 각종 소재를 이용해 새롭게 단장하는 게 그의 작업이다.
“다른 사람의 작업에 마지막 점을 찍는 느낌이랄까, 일을 끝내는 순간에는 ‘황홀경’이 따로 없죠.”
홍대 앞에 있는 그의 작업실 이름은 ‘렉토 베르쏘(Recto Verso)’. 책의 앞 뒷장을 뜻하는 라틴어다.
작업실 안은 제본·장정용 기구 및 소도구로 가득하다. 10여년전 프랑스 유학시절 꼬박 3개월에 걸쳐 표지에 금박을 입힌 작품부터 5월 전시를 앞두고 제작 중인 가로 세로 10㎝ 가량의 ‘꼬마책’까지 그의 ‘자식’들이 제각각 멋을 뽐낸다.
“평생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중세의 어느 한 지점에 서 있는 듯한 느낌, 책에 옷을 입히며 평생을 보냈다는 선생님들의 ‘장인적’ 분위기….”
전통적인 예술제본장정을 고집하는 UCAD에서 3년을 보낸 뒤, 한국인 최초로 예술장정분야의 직업교원자격을 취득해 프랑스 정부가 인정하는 ‘를리외르(Relieur·예술제본장정가)’가 됐다. 대중과 더 가까운 현대적 예술제본장정을 배우기 위해 ‘아틀리에 베지네’에서 3년을 수학하고 소르본 파리 1대학 박사과정을 준비하다 1998년 10월 귀국했다.
“국내에서는 이 일이 학교 앞 제본집 아저씨가 하는 일 정도로 밖에 알려지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밥벌이’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1999년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부스를 연 것을 계기로 알음알음 그를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실기 코스를 열어 요즘은 매일 2∼3명씩 가르친다. 전체 수강생은 20여명.
문학과지성사가 발행하는 작가연구전집인 ‘깊이 읽기’ 시리즈도 예술제본장정으로 새롭게 꾸며낸다. 그가 장정한 책은 ‘깊이 읽기’시리즈에 소개된 작가에게 증정된다.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 고문은 “백순덕씨를 통해 예술제본장정의 세계를 처음 알았다. 책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우리 풍토에서 백순덕씨의 작품은 특별히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젠지 아세요? 지루한 중간과정을 다 넘기고 마지막 표지 씌울 때예요. 그 말할 수 없는 기쁨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나봐요. 책 한권에는 책을 쓴 사람, 책을 제작한 사람, 삽화를 그린 사람, 표지를 디자인한 사람, 그리고 제본가가 있어요. 제가 하는 일은 마지막 일이죠. 모든 영역이 만나는 일이예요. 100년이상 책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 바로 ‘나’거든요.”
문득 머릿속에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라는 기형도의 싯구절이 떠올랐다. 그 시집을 백씨가 다시 제본한다면 그 구절은 고쳐써도 될까, 라는 ‘실(絲)없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