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 24시'로 본 올 한해와 새해 소망

  • 입력 2000년 12월 29일 18시 47분


요란한 폭죽과 함성으로 시작한 새 천년 첫해가 저물고 있다. 메트로폴리탄들에게 2000년은 어떠한 해였고 남은 회한은 무엇일까. 동아일보 메트로팀 기자 12명이 28일 오전 6시부터 29일 아침까지 24시간 동안 12명의 시민을 만나 한해살이에 대한 소감과 새해에 거는 기대를 들었다. ‘고단했지만 의미 있었다’는 그들의 절절한 사연을 소개한다.<편집자>

:오전 6시: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수술실 앞에서 푸른색 수술복을 입은 심장내과 전문의 박승정씨(46)를 만났다.

그는 “의약분업 파동으로 의사들이 고단하고 괴로웠다”면서 “의사들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는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전 10시: 국내 최고의 건설업체이지만 유동성 위기로 1년 내내 부도 공포에 시달렸던 현대건설의 홍보부 이동진 대리(31)는 올해를 한두 마디로 정리했다. “충격과 안타까움, 그리고 희망입니다. 9월에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겁이 덜컥 나더군요. 10월엔 결혼했는데 가족이 생기고 회사가 어려워지니까 회사에 대해 더욱 애착이 갔어요. 내년엔 다시 한번 ‘현대신화’에 도전하겠습니다.”

:낮 12시: 지방 출장 중인 우원형씨(67·사업)를 전화로 ‘상봉’했다. 그는 올해 온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2차 방북 이산가족 상봉자의 한 사람이다. 우씨는 “누가 뭐래도 내게는 가장 의미 있었던 해”라면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 다시 동생을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2시: 올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풀뿌리 시민운동의 한해살이 소감을 듣고 싶어 경기 고양에 ‘러브호텔 아저씨’로 널리 알려진 시민운동가 이승면씨(41)를 찾아갔다. 그는 “일년 내 땀흘리며 집회를 열고 주민토론회도 열어 ‘여론화’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구체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내년에는 반드시 결실을 보겠다”고 다짐하면서 서둘러 ‘러브호텔’ 감시에 나섰다.

:오후 3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LG투자증권 본점 영업부 노은혜씨(24). “반토막난 주식시장 때문에 애간장이 녹았다”면서 “내년에는 주식시장이 활기를 되찾아 제가 갖고 있는 우리사주 1030주가 든든한 결혼밑천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오후 4시: 올 최고 흥행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제작사인 서울 종로구 명륜동 ‘명필름’을 찾아갔다. 새 영화 준비에 정신이 없는 여사장 심재명씨(37)는 “영화사가 ‘습격’당하는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창립 5년 만에 대흥행 기록을 세우게 돼 보람이 있었다”면서 “빈 마음으로 새 기록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오후 6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문화관광위의 곽현준 입법조사관(29·여)을 만났다. 10월 정기국회 이후 거의 매일 계속된 야근 때문인지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이었다. “내년에는 출근길 택시를 탔을 때 마음 편하게 ‘국회로 가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도록 국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돼 국민의 신뢰를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검찰청. 직원과 함께 자장면으로 점심을 먹으며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한 사건기록을 뒤지고 있는 서울지검의 Q검사를 만났다. 조직 특성상 사진과 실명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응했다.

검찰총장 탄핵 파동 등 바람 잘 날이 없었던 한 해를 보내는 소감을 묻자 “정치권이나 언론이 자신들의 뜻대로 수사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검찰을 탓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우회적으로 불만을 토로한 뒤“엄정한 수사는 검찰의 힘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며 ‘뼈 있는’ 한마디를 보탰다.

:오후 10시: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벤처기업 아이팝콘의 본사에서 만난김세중 경영기획실장(33).

연초 벤처특수로 호황을 누리다 하반기로 접어들며 천덕꾸러기로 여겨지는 등 천당과 지옥을 오간 한해살이의 느낌을 묻자 “새벽 4, 5시에 출근해 원도 끝도 없이 일했다.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한 기억밖에 없다. 내년 계획도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는 있을 수가 없다”며 회의시간을 빼앗는 기자를 몰아냈다.

:밤 12시: 서울 지하철 강남역 일대. 송년회를 마친 취객과 손님을 골라 태우려는 운전사의 실랑이가 영하의 날씨를 녹여내고 있다. 7년 경력의 개인택시 운전사 강용욱씨(39·경기 의정부시)도 그 속에 있었다.

“올해 택시 안 화제는 전반기는 ‘정치와 남북문제’, 후반기는 ‘경제’였어요. 올해에는 불만이 많은 승객이 대부분이었는데 내년에는 즐겁고 행복한 손님들을 많이 모시면 좋겠네요.”

:오전 1시 20분: 서울 여의도 KBS본관 라디오 스튜디오. 오후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는 ‘박수홍 박경림의 FM인기가요’ 생방송이 끝났지만 두 진행자는 내일치 방송대본을 보며 한창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들 역시 “하반기 들어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직장인들 얘기가 많이 접수됐다”며 “내년에는 밝고 건강한 사연들을 많이 소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전 4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찾아 예불 준비로 미명(未明)을 맞는 덕조스님을 만났다.

“‘과거를 쫓지 말라,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과거는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오늘 할 일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죠. 새해에는 모든 분들이 하루하루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살아가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정리〓황재성기자>jsonh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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