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사람냄새 물씬한 '詩人들의 속내'

  • 입력 2000년 12월 8일 19시 03분


◇ 시인들의 풍경 / 김윤배 지음 / 297쪽 7000원 문학과지성사

시인들끼리 만나면 무엇을 할까? 대부분 술 마신다. 김윤배 시인의 산문집 ‘시인들의 풍경’에는 그가 22명의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술 마시고 여행간 이야기가 가득 실려 있다.

그 이야기 한 토막. 울진으로 임영조, 김명인 시인 등과 함께 여행갔을 때다. 시인 일행은 불영계곡에서 천렵을 하며 대낮부터 목을 축이고 후포항으로 이동, 생선회를 안주로 거나한 술판을 벌인다.

이어 일행은 김명인 시인의 평해 고향집으로 몰려가 술자리를 연장한다. 달이 떠오르고 오죽(烏竹)의 잎사귀들이 살 비비는 소리가 들려올 때쯤이면 그 술자리는 가히 통음난무라 불릴 정도로 무르익는다. 김명인 시인의 구성진 ‘뽕작’이 흘러나오고 이어 음치편에 속하는 임영조 시인의 ‘불나비’가 동해 바다의 평화를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면 그 오랜 주야(晝夜)의 술자리는 드디어 막을 내린다.

그렇다고 바로 잠들면 어디 시인들인가. 오십 줄에 접어든 사내들이 벌거벗고 낄낄거리며 마당의 찬 샘물로 목욕을 한다. 이때 그들의 보잘 것 없는 육체를 적시는 것은 물이 아니라 청청한 달빛이다. 시인들마저 이런 낭만을 구가하지 않는다면 이 험악한 시대에 어디에서 낭만을 찾을 것인가.

김윤배 시인은 이 책에서 신경림 시인에서부터 젊은 장석남 시인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22명의 시인들을 ‘찾아’다닌다. 그것은 부지런한 발품이기도 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천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시인은 젊은 시절, 청년 교사로 경기도 안성에 근무할 때, 술과 당구와 춤에 탐닉했다고 고백한다.

누구에게나 쓰라린 세월이 있겠지만 그 10여 년의 세월이 김윤배 시인에게는 시인으로서의 우화등선을 위한 시간과 감정의 축적기였을 것이다. 그 시절을 견디고 난 뒤 혈기방장한 젊은 교사는 시를 위해 투지를 불태운다.

마침내 늦깎이로 등단 한 뒤에도 김윤배 시인은 무림을 떠도는 검객처럼 가슴에 시심(詩心)이라는 칼을 품고 시단의 고수들을 찾아 동해로 남해로 떠돌아다닌다. 한 판의 진검 승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시 세계를 염탐하기 위해서다. 염탐해서 그들의 시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이 산문집은 22명의 시인들에 대한 작은 시론(詩論)이며, 그들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 고백의 한복판에는 물론 김윤배 시인의 시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다. 시인이 시인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내밀한 내면의 풍경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장품처럼 견고한 침묵과 순금으로 빛나는 시 정신의 보고였다”고 토로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김윤배의 시인의 시에 대한 열정을 바로 감지할 수 있다. 항상 보고자 하는 자만이 볼 수 있는 법이다.

아마도 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시인을 찾아서’에서 책 쓰기의 발상을 얻었을 법한 ‘시인들의 풍경’은 시인이 쓴 시인론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김현의 책이 시인들에 대한 사랑과 냉정한 분석과 촌철살인의 예지가 번뜩였다면, 이 책은 동업자에 대한 신뢰와 자신의 시작(詩作) 과정의 비밀 일부를 드러내고 있다.

하여 말의 조합과 말의 몇 마디 변주에 울고 웃는 시인들의 순진한 세계가, 그들의 직업상의 비밀이, 고스란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시인들의 풍경을 향해 떠나는 여행’에 동참하시지 않으시렵니까.

하응백(문학평론가·국민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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