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벤처밸리]불꺼진 '벤처의 窓'

  • 입력 2000년 11월 7일 19시 27분


“올 상반기만 해도 북적거리는 손님들로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시간인데…. 추석 이후 매상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 지금은 현상유지조차 힘듭니다. 2년 전 외환위기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 같아요.”

4일 오후 10시 서울 강남 테헤란로 벤처밸리 인근 골목의 Y일식집. 국내 최대의 ‘벤처메카’인 이 곳에서 5년째 일식집을 운영해온 정모씨(39·여)는 텅 빈 가게 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떨궜다.

정씨는 “하루가 다르게 문을 닫는 닷컴기업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손님이 없어요"◇

불과 서너달 전만 해도 오후 8시면 불야성을 이루던 서울 테헤란로의 서울벤처밸리 주변의 유흥가가 불황 탓으로 불꺼진 네온사인이 많아 어둑어둑하다. 유흥가 중 한 룸살롱이 손님이 없어 내부가 텅 비어 있다.

◇불황 한파에 서울밸리 꽁꽁…저녁 8시면 썰렁◇

수개월째 바닥을 기는 코스닥시황, 벤처의 총체적 불신을 부추긴 ‘정현준게이트’, 그리고 꽁꽁 얼어붙은 자금시장…. 한때 벼랑 끝 한국경제를 되살릴 ‘구세주’로 떠올랐던 벤처업계의 중심지는 이미 어느 해보다 ‘혹독한 겨울’로 접어들었다.

이른 새벽까지 불야성을 이뤘던 빌딩의 사무실은 불꺼진 채 빈곳이 더 많고 업체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느라 비상이 걸린 상태다. 이런 벤처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인근 상권과 관련 업계들은 그 여파를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6일 오후 8시경 테헤란로 인근의 유흥가와 상가 대부분은 셔터를 내린 채 인적조차 드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문을 연 나머지 가게들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 지난 1년 동안 이 곳에서 카페를 운영해온 윤모씨(38·여)는 며칠 전 가게를 처분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소에 내놓았다.

9월 이후 주고객인 벤처업체 직원들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매상이 지난해 3분의1 수준으로 격감해 더 이상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것. 윤씨는 “회사가 문을 닫아 하루아침에 쫓겨난 직원이 부지기수”라며 “이들 중 일부는 가게를 찾아 눈물의 송별식을 갖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지난달 명동에서 이 곳으로 옮겨 C단란주점을 운영 중인 이모씨(38)는 “벤처경기가 나쁘다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10여개의 룸 중 하루 평균 2개 이상 차는 경우가 드물다”며 한숨지었다. 이 밖에 짭짤한 수익을 올렸던 인근의 24시 야식가게들도 손님이 줄면서 오후 10시만 되면 대부분 문을 닫는 모습이었다.

◇"벤처인들 정신적 공황상태"◇

벤처불황의 당사자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달 대규모 인력감축을 한 인터넷기업 S사는 최근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테헤란로 밖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 직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이 회사에 근무하는 김모씨(35)는 “인력감축과 월급 미지급 등으로 직원들의 동요가 심한 상황”이라며 “그렇다고 예전 직장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상당수의 벤처맨이 정신적 공황에 빠져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넷기업 L사의 홍보팀장 한모씨(33)는 “밸리의 벤처기업 절반 이상이 심각한 자금난으로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6개월째 밤늦은 시각 벤처업체들을 돌아다니며 찹쌀떡과 메밀묵을 파는 장태일씨(28)는 “사무실마다 예전의 생기는 간데 없고 무거운 침묵뿐”이라며 “게다가 내년 2월 벤처위기설까지 파다하게 퍼지면서 밸리는 한 마디로 민심이 흉흉한 상태”라고 말했다.

<윤상호·박정훈기자>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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