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누드크로키전]'충동'은 잠시…美에 취하다

  •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08분


“두꺼운 청바지를 입고 오세요.”

누드크로키전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하자 주최측인 아트빌미술방송국의 여성홍보담당자는 이렇게 충고를 해줬다.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관훈동 갤러리 KH 아트빌 조형연구소. 참가자는 전문작가 5명을 포함해서 약 30명. 앳된 얼굴의 여자가 샌들을 벗고 손목시계를 푼다. 마지막으로 가운을 벗고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가까운 거리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선다. 가로 세로 열걸음도 채 안되는 좁은 공간에 침이라도 삼키면 들릴 듯한 침묵이 흐른다. 눈길이 그녀의 몸을 훑는다. 두꺼운 청바지를 입고 오라는 말의 의미가 ‘불현듯’ 깨우쳐진다.

그녀는 작업이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처음 누드를 그리는 사람은 눈빛만 보고도 알 수 있어요. 음흉해요. 대개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달라지지만 끝날 때까지도 그 눈빛이 안 변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은 나가달라고 부탁해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눈길이 ‘특정’ 부위에 멈춰 있을 시간이 없다. 모델이 금방금방 자세를 바꾼다. 순간을 포착해 그리는 크로키에서는 한 자세에서 길어야 3분 이상을 끄는 경우가 없다. 어깨선 등선 허리선 등의 흐름을 좇느라 정신이 없다. 몸이 처음 봤을 때보다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누드 모델은 벗은 여자가 아니라 짐승, 즉 어떤 ‘원초적인 존재’예요. 누드란 본래 옷을 벗은 것이 아니라 입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 있어요. 즉 인간의 원초적인 상태는 누드(nude)이고 옷을 입은 것을 코스튬(costume)이라고 따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죠. 전 일할 때 일부러 화장은 하지 않아요. 발톱이나 손톱에 매니큐어도 칠하지 않죠. 여자로 보이지 않으려고 연출을 하는 거죠”

작업을 끝내고 ‘코스튬’의 세계로 돌아와서 옷을 차려입은 그녀를 봤을 때 약간 실망감이 든다. 그림을 그리면서 본 그녀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녀의 말처럼 그림을 그리는 어느 순간 한 여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몸을 가진 한 짐승을 쫓고 있었는지 모른다.

공무원 발령을 앞둔 한 참가자(31)는 “사실 호기심 때문에 찾았는데 막상 누드그림을 그리다 보니 나체의 여자가 출연하는 영화나 연극을 볼 때와는 달리 남성적인 충동이 빠른 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트빌미술방송국의 진형민 부사장은 “공개적인 누드크로키전을 기획했을 때는 성을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어 걱정도 많이 했다”면서 “그러나 실제로 해보니까 누드크로키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 크게 잘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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