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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6월 30일 20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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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의 작가, 근대 소설의 원조 세르반테스가 죽는 순간까지 인류에게 모범적 소설의 형태와 내용으로 제시하고 싶었던 야심작이 바로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고행 (Los trabajos de Persiles y Sigismunda)’ 혹은 ‘사랑의 모험’이라는 소설이다. 헬리오도로의 산문 서사시 ‘에티오피아 이야기’ 스타일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은 ‘돈 키호테’ 1, 2권을 통해 연습한 신(新)소설의 즉흥성과 어수선함을 보완하고 다양한 에피소드 속의 통일성을 서사시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시도한, 그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소설이다.
‘비잔틴 소설 기법’이라고 불리는, 수 많은 모험과 우여곡절로 재미를 일구는 이야기투를 이 소설은 사용하고 있다. 북극 근방 어느 왕국의 왕자 페르실레스와 아름다운 시히스문다 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주축이 된다. 연인들은 각각 ‘페리안드로’ ‘아우리스텔라’라는 가명을 쓰고 남매간으로 위장, 로마에 이르기까지 포로가 되기도 하고 마녀에게 당하기도 하는 등 갖가지 수난과 모험을 겪는다.
소설 내용은 외적으로는 바다를 통한 긴 여행길이지만, 내적으로는 왕들, 해적들, 야만인, 기사, 점성가, 마술사가 뒤엉킨 마술적 사실주의의 무대이다. 거기에는 인생살이의 절망과 공포, 고난과 어둠, 포로됨과 자유, 지옥과 천국, 죽음과 부활에의 희망이라는 상징이 깔려 있다. 결국 이 두 연인의 고행은 사랑의 승리, 믿음의 승리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소설은 세르반테스가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죽는 순간까지 삶에 대한 긍정적, 희망적 비전을 버리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가 처음 쓴 소설이 ‘갈라테아’라는 목가소설이었고, 그의 화신 돈 키호테가 결투에서 참패한 후 마지막 희망이 목동이 되어 푸른 초원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듯이, 이 소설 속 페리안드로의 꿈 속 천국도 ‘풀 이파리라기 보다는 에머랄드가 펼쳐져 있는 초원’ 같은 목가 천국이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이 새 천년에 다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19세기 이후 역사적 사회적 사실주의에 찌들어 있던 소설 양식이 오늘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때문이리라. 중남미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의 원조가 세르반테스의 소설이었다. 세르반테스의 눈은 보이지 않는 마술적 현실까지를 우리가 사는 현실로 통찰하는 총체적인 눈이다. 요정과 마법사가 판치는 세상, 왕과 공주의 모험담이 우리의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좁은 현실관은 넓은 우주 속에 사는 우리 삶의 구도를 억지로 좁혀놓았다. 세르반테스 소설의 마술적 환상적 비전은 이런 답답한 우리의 현실관을 벗어나 장자적 우주 세계로의 여행을 권한다.
새 천년의 현실은 꿈이 현금이 되는 세상이다. 요즘 벤처 기업이 그렇고 인터넷 캐릭터들이 그렇다. 이 새로운 시대에 세르반테스의 ‘사랑의 모험’은 원래 소설의 재미가 무엇이었으며 소설이 어떻게 우리 삶의 폭과 깊이를 가장 진솔하게 반영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조구호 임효상 옮김. 588쪽 9500원.
민용태(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