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52)

  • 입력 1999년 3월 1일 18시 20분


마침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인이 몇 안되는 뜸한 순간이었다. 혜순은 지하도에서 올라와 덕화가 뛴 방향을 두리번거렸지만 인파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네는 주춤주춤 다가오는 택시에 돌격하듯이 올라탔고 을지로 쪽으로 달렸다.

가면서 보니까 덕화 형이 눈썹을 날리며 을지로 입구 쪽으로 뛰고 있어. 창문을 내리고 곁으로 지나치며 불렀는데두 안들리나봐. 뒤에서 계속 차가 밀려오니 택시를 세울 수두 없구. 뒤돌아 보니까 얼굴이 시뻘겋더라. 그만큼 갔으면 행인들 틈에서 점잖게 천천히 걸어 가는 게 훨씬 눈에 안띄고 좋을텐데.

그럼 그 친군 어디루 간 거야?

몰라, 일차 약속 장소에 안왔어. 수칙대루 삼 십분 기다리다 석준씨한테 보고하구 이차 약속 장소루 왔지.

나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덕화가 강박감이 심해진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이런 일이 무리라고 생각 되었다. 그를 제외 시키기로 하자. 뒷정리는 그를 데려온 건이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서울에서는 여러 갈래의 팀들이 각기 활동 중이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의 활동을 눈치 채면서도 모른척 했지만 영등포 시장 앞과 종로에서의 시위 계획이 있었을 때에는 지하에서 서로 연락이 되어 보도의 양쪽과 골목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시간이 되었을 때 영등포에서는 작은 무리가 차도로 뛰어나가 구호를 외치고 순식간에 잡혀 버렸고 종로에서는 기독교회관 옥상에서 선도 투쟁자가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며 투신했지만 종로 거리의 시위 대기자들과는 연결되지 못했다.

광주에서 마지막 전투와 도청 진압이 끝난 새벽에 우리는 이미 연락을 받아 알고 있었다. 동우와 나는 처음에 숨어 지내던 그의 형의 공장 건물에서 나와 산동네에 방 두칸짜리 브로크 집 독채를 빌려 살고 있었다. 그 집을 아는 사람은 건이와 석준이 뿐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을 새웠다.

일곱시 쯤에 광주를 빠져나온 사람들의 연락이 서울의 각 거점에 연결되었다. 우리는 서로 붙잡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사태는 끝났지만 작전은 한 달쯤 더 계속 되었다. 조직 정비를 위해서 여름부터 휴면에 들어갔다. 그동안에 회원은 훨씬 줄어들었다. 현장에서 나왔던 사람들도 되돌아가거나 야학 일로 관심을 바꾸었다. 열 다섯명 정도가 아직도 정기 점검에 응할 뿐이었다.

먼저 검거되었던 남수는 손톱이 빠지는 무서운 고문을 견디고 십오년 형을 받았다. 몇몇은 무기, 몇 사람은 사형 언도였다. 남수가 대중집회에서 낭송하고 다니던 네루다의 시가 생각나는 지루하고 적막한 여름이었다.

아아 얼마나 밑 빠진 토요일이냐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이 매력적인 도시

호텔마다 물결치는 발들 성급한 오토바이의 주자들

폭주하는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엄청난 부동자세의 여자들

매주일은 남자들과 여자들과 모래 위에서 끝난다

무엇 하나 아쉬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산으로 올라가고

의미도 없이 음악을 틀어 놓고 마시고

기진맥진 콘크리트 바닥으로 다시 돌아온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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