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지우,8년만에 시집 「어느날 나는…」 펴내

  • 입력 1998년 12월 24일 18시 56분


음울했던 80년대, 거침없는 시어와 새롭고 낯선 형식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 지식인과 소시민의 허위의식과 맞서 싸웠던 시인 황지우(46). 그는 80년대 한국시에 있어 하나의 상징이었다.

황지우가 새 시집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를 냈다. ‘게 눈 속의 연꽃’(1990)을 낸 지 꼭 8년만이다.

격랑의 시대를 헤쳐온 한 시인이, 이념이 무너져버린 90년대의 진공상태에서 걷잡을 수 없는 정신적 공황을 겪었던 한 시인이, 지금 세기말의 끝자락을 어떻게 건너가고 있는지. 이 시집엔 그러한 고뇌와 사유의 흔적이 짙게 깔려 있다.

‘슬프다//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뼈아픈 후회’중)

이 시집은 우선 그 제목부터가 낭만적이다. 삶의 허무가 짙게 풍겨나기도 하고 어쩌면 속세에 연연해하지 않는 초월의 모습 같기도 하다.

욕심이나 집착을 버리니 과거의 ‘내’가 속절없어 보인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생이 끔찍해졌다/…/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중)

그러나 그의 시는 상실과 허무에 매몰되지 않는다. 상실이나 결핍은 출발이고 힘이기 때문이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어쩌다 한순간/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우리,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저 화엄탕에 발가벗고 들어가/생을 바꿔가지고 나오고 싶다’에서처럼 화엄(華嚴)이나 선(禪)의 불교적 색채도 어른거린다. 이념 투쟁보다 더 깊은 곳으로 그의 시는 가고 있다. 그는 87년 시집 ‘나는 너다’의 후기에서 다스 카피탈(Das Kapital·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뜻함)과 화엄 사이, 그 좌와 우의 깊은 간극에 대해 고뇌했고 그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시에 대해 고뇌했었다. 당시 그는 물론 다스 카피탈에 가까웠고 지금은 화엄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시는 하나에 편향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양자의 포괄을 추구한다. 황지우는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도인(道人)의 길로 가면 시가 필요하지 않고 그렇다고 시가 투쟁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는 둘 사이의 경계선,그 떨림이 아닐까.”

떨림이 없으면 시의 감동도 없다. 그가 종종 ‘아, 옛날에 내 노래를 들어주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가?/다시 탄압이나 받았으면’하고 말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떨리고 그의 시는 더욱 긴장한다. 미세한 떨림은 어쩌면 그의 촉수가 더 예민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다른 새로움을 찾아나서는 출발이기도 하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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