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의 아버지들③]그래도 찡한 父情

  • 입력 1998년 5월 6일 20시 19분


“운동회 날인데요. 다른 친구들은 다 엄마가 오셨는데 저만 아빠가 왔지 뭐예요. 왜 아빠가 오셨느냐고 막 신경질을 냈걸랑요. 그랬더니 아빠가 너무 미안해하며 안아주셨는데, 그러면서 막 우시는 거예요.” 지난해 아버지가 실직해 엄마가 식당에 나간다는 P초등교4년 최모양의 얘기다.

외롭고 힘빠진 아버지들. 허덕이는 일상속에서 모래알을 삼킨 것처럼 푸석푸석해져 있는 가슴 속. 그러나 그 속엔 아직도 한 줄기 따뜻한 강물이 흐른다. 자식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민주야,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구나. 연탄가스 때문에 걱정이다. 동네 개나 큰방 개가 짖어댈 때는 잠을 자지 말고 주의를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이 삶의 큰 지혜가 아닌가 한다.”

연탄을 피우는 단칸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딸에게 보낸 한 아버지의 편지(문이당 발행 ‘아버님전상서’ 중에서). 딸의 고생을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행간에 배어 있는 이 편지처럼 아버지의 사랑은 요란하지 않다.

하지만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깊이와 넓이. 모성애가 그렇듯 부성애도 시대를 구분하지 않는다. IMF시대라 해서, 괴성을 지르던 X세대가 아버지가 됐다 해서 부성애가 사라지진 않는다.

아버지들은 사랑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로 병상에 누웠던 구회씨(38·경기 부천시 고강본동)의 회상. “늘 엄하게만 생각됐던 아버지가 다 큰 자식의 대소변수발은 물론이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마사지하고 굽혔다 폈다 해주시기를 하루에도 수백번…. 어느 늦은 밤 병동 사람들이 다 잠든 후, 아들에게 들킬세라 소리없는 흐느낌으로 침상 위에 피보다 더 진한 눈물을 토해내시더군요.”

아버지의 큰 사랑이 위대한 업적을 이뤄내는 건 영화속의 얘기만은 아니다.

단국대 이상훈교수(37)는 선천성심장질환을 앓는 아들 승리군(8)에 대한 애끓는 부정으로 5년간의 노력 끝에 최근 ‘공압식 심실보조장치’를 개발해냈다. 새 장치의 이름도 아들의 이름을 따 ‘VICTORY(승리)’.

자식들은 아버지의 빈 자리에서 그의 사랑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마련. “아빠, 이 엽서가 아빠가 계신 곳까지 전달될 수만 있다면 1억원짜리 우표라도 붙여 보내고 싶은 마음이에요.… 8년전 아빠는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저희 곁을 떠나셨지요.… 저는 한 남자의 아내가 돼요.… 하나밖에 없는 딸 너무도 예뻐하셔서 이름 대신 항상 공주라고 불러주신 아빠, 이젠 전 누구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나요.… 하지만 아빠, 하늘나라 어디선가 아빠가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절대 울지 않을게요….”(태평양생명주최 ‘아빠사랑캠페인’에 접수된 엽서 중에서).

다산 정약용, 네루, 김대중 등 저명인사들이 자식에게 보낸 편지는 그 속에 담긴 절절한 부성애의 힘으로 나중에 책으로 엮여나와 명저로 읽힌다. 하지만 여기 한 평범한 아버지의 맞춤법 안맞는 편지도 읽어보자. ‘아버님…’에 수록된 김경연씨의 사연.

결혼을 앞둔 김씨는 꼽추인 아버지가 창피해 결혼식장에 큰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오빠는 김씨의 따귀를 때렸지만 아버지는 “걱정 말그래이. 요즈음 허리가 하루가 다르게 아파오니, 어차피 식장에는 못 갈 것 같구나”고 딸의 마음을 어루만진 채 결혼식날 홀로 골방에 누워 계셨다.

그뒤 임신한 김씨. 어느날 집 근처 가게 아줌마에게서 청국장 보따리를 전해 받았다. 입덧하는 딸에게 주려고 버스를 세번이나 갈아타고 온 아버지가 혹시 딸이 시댁식구 앞에서 불편해할까봐 가게에 짐과 메모를 맡긴 채 말없이 돌아가버린 것.

“야야, 너거 어미가 올라카다가 일 나가서 모도고(못 오고) 내가 대신 가지고 왔대이. 하나는 청국장이고 하나는 거쩔이(겉절이)다. 배골찌(배곯지) 말고 마싯게(맛있게) 먹그래이.”

〈이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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