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시대 결혼행진곡/혼수]돈『꽁꽁』 사랑『펑펑』

  • 입력 1998년 3월 16일 19시 38분


“평생 아껴주며 살겠습니다.”

지난달 7일 결혼한 이구원씨(31·H정보통신). 결혼 1주일전 혼자 함을 메고 신부 권수현씨(26·H그룹비서실) 집을 찾았다. 홍색 겹보자기로 싼 함단지 대용 트렁크. 단출한 예물에 이어 편지 두 통을 꺼냈다. ‘장인 장모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와 ‘아껴주며 살겠다’는 결혼서약. 처음엔 쑥스러워 더듬대다가 점점 낭랑해지는 예비 사위의 편지 읽는 목소리에 장모는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매서운 국제통화기금(IMF)한파를 맞아 한창 거품이 빠지고 있는 결혼문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 연출하는 생애 최고의 이벤트’인 결혼. 대충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 거품은 빼되 결혼의 참의미는 살리려는 ‘혼수다이어트’아이디어가 만개하고 있다.

우선 함문화. 예비 신랑 혼자 함을 지고 가는 ‘나홀로 함진아비’는 이미 보편적 현상.

전통관습을 생략하는 게 섭섭해 친구들이 동원되는 경우에도 수십만원의 돈봉투가 길에 깔리는 걸쭉한 ‘한판’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지난해 12월말 함을 받은 강수영씨(29). 조카 사촌동생 등 일가 아이들이 총동원돼 골목입구에서 결혼 축가를 불렀다. 함지기들도 함값 승강이 한번 없이 순순히 들어왔다.

봉투를 깔긴 깔되 현금 대신 도서상품권 즉석복권 등을 넣는 집도 있다. 물론 친구들이 돌아갈 때 따로 함값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 하지만 액수는 길가에서 실랑이를 벌이면서 주는 것보단 훨씬 절약된다.

함들이는 날을 결혼식 뒤풀이 대용으로 삼는 커플도 늘고 있다. 지난달 결혼한 강재영씨(23·주부·서울 구로구 구로동). 신랑(28)이 먼저 함을 가지고 왔고 1시간쯤 후 신랑 신부 친구들이 찾아와 결혼 앞잔치를 했다.

혼수 준비 과정에서도 ‘살벌한 구조조정’이 진행중이다. 식기세척기 그릇세트 원앙금침이불 대형장롱 가스오븐레인지 주서기 등 꼭 필요하지 않은 혼수품들은 가차없이 리스트에서 지워진다. TV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 ‘나름대로 경쟁력 있는’ 혼수품들도 크기가 작아지고 외제품은 사양이다.

아예 신혼 살림을 중고품으로 꾸리는 커플도 많다. 서울 마포구청재활용센터 박영숙판매담당주임. “IMF이전엔 중고품을 찾는 예비부부 손님은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한달에 서너쌍씩의 예비부부가 신혼살림을 장만해 간다. 옷차림은 멋쟁이지만 헌물건에 대한 거리낌이 전혀 없어 보인다.” 결혼반지도 대물림받는다. 지난달 17일 결혼한 최영수씨(23·경기 의정부시 덕계리)는 장인의 반지를, 신부(20)는 시어머니가 끼던 것을 세팅해 받았다.

결혼식 비디오 촬영을 8㎜소형카메라로 친구가 찍어주고 신부마사지는 동네 목욕탕에서 하는 짠순이 신부도 있다. 예비 부부 ‘공동통장’을 만들어 결혼비용을 한 계좌에 넣어두고 함께 사용처를 결정하기도 한다. 결혼준비 과정에서 사돈집 눈치를 보다가 혼수비용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위해서다.

예전엔 신혼여행지로 가는 비행기시간이 오전일 경우 시내 호텔에서 하룻밤 잔 뒤 다음날 공항으로 가는 게 관례. 하지만 요즘은 아예 신혼살림집에서 첫날밤을 보내는 커플도 많다. 7일 결혼한 김모씨(28·서울 강서구 방화동)는 결혼식후 신혼집에서 신랑(32·H중공업) 신부친구들과 간단히 파티를 한 뒤 첫날밤을 보내고 8일 오전 신혼여행을 떠났다.

평생 한번뿐인 결혼. 생략되는 절차들에 섭섭함이 없진 않겠지만 그보다는 실속을 차리는데 대한 자부심이 더 큰 것 같다. 지난해12월 결혼하면서 함, 뒤풀이를 생략한 것은 물론 침대커버와 예쁜 이불, 컴퓨터를 제외한 모든 혼수용품을 대물림해 받은 신정은씨(23·주부·전북 익산시). “우리 부부가 유달리 ‘짠순이’는 아니에요. 단지 결혼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고 더 나은 방도로 고민했어요. 이번에 못한 것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좋은 방법으로 실현할거예요.”

지난달14일 결혼한 변영미(29·P문화산업) 이중환씨(29·S전자)씨 커플. 결혼전날 예비신랑이 홀로 메고 온 함에는 14K반지와 한복 한벌, 고무신 한켤레가 단출히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구석에 시어머니의 선물. ‘사랑하는 며느리에게’로 시작하는 편지와 함께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집 한권. 제주도에서의 신혼여행 첫날 오후. 성산포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변씨 부부는 시를 낭송했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목사는 바다를 듣는다/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산다(이생진의 ‘그리운 성산포’)

〈이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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