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희 소설집 「플라스틱섹스」]신세대 性반란 묘사

  • 입력 1998년 2월 9일 07시 58분


담배연기와 귀가 터져나갈 듯한 음악소리, 색색의 스프레이낙서가 벽을 가득 채운 록카페의 아수라장. 작가 이남희(40)는 지금 그곳에 오도카니 앉아있다. 테이블위에 놓인 책, 현대화가 데 키리코의 그림이 얹힌 소설집 ‘플라스틱섹스’(창작과 비평)는 방금 그가 펴낸 것이다. 불과 2년전 나도 이제 ‘사십세’(창작과비평사)가 되노라고, 그래서 80년대 내내 역사와 변혁이라는 이름을 걸고 원수처럼 싸워왔던 아버지세대와도 화해의 악수를 나눌 수 있게 되었노라고 썼던 그 이남희냐고 낯설어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때 그는 풍요로운 소비사회의 성전(聖殿)인 ‘슈퍼마켓에서 길을 잃었다’며 신경질적으로 손톱끝을 물어뜯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 찾아든 록카페에서 그는 그아이 초록이를 발견한다. 머리가 터져라고 흔들어대며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말들어/싸워라, 짓밟아라, 이겨라, 악착같이 성공해라/난 속물처럼 살긴 싫어, 성공하면 뭐할건데…”라고 노래 부르는 아이. “섹스는 생식이 아닌 놀이니까 여자끼리든 남자끼리든 남녀사이든 여자둘에 남자하나든 서로가 남김없이 통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며 마음에 드는 여자들 앞에서 거침없이 옷을 벗는 처녀. 초록은 ‘변혁’이라는 거대담론이 말해지던 시대에는 하찮은 것일 뿐이었던 ‘성(性)정체성’문제에 관해 작가를 뒤흔들어 놓는다. 동성애를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자칫하면 사법처리를 받을 수 있는 ‘엄숙주의’사회에 대고 초록이의 상대, 중년의 여성소설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같은 성이기 때문인지 서로의 욕망에 민감했고 같은 감정에 빠져드는 때가 많았으며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배려도 어디까지나 동등하게 주고 받는 편이었다. 남자와 관계할 때의 미진한 느낌, 때로는 맛보게 마련인 굴욕적인 느낌은 이런 섹스에서는 없었다’ 그러나 한때 초록이 만큼이나 기성의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했던 작가는 이제 초록이의 파괴적인 ‘역할뒤집기’ 앞에서 머뭇거린다. “내가 젤 싫은 건 말야, 사람들이 말만 앞세운다는 거야. 내 인생은 나의 것 어쩌구 말은 번듯하게 하는 주제에 실제론 남의 눈치에 맞춰서 대강 살거든” 하는 초록이의 경멸 앞에 당황한다. 젊은 세대의 변화가 거품이 아니라 일상성 영역에서의 보이지 않는 변혁이라고 진단하는 작가. 그는 초록이의 얘기를 더 쓰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나에겐 미지의 대륙이며 발견의 기쁨이 큰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만큼 위험도 클 것이다.”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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