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김기영감독 작품세계]뒤틀린 性묘사 독보적

  • 입력 1998년 2월 9일 07시 58분


5일 불의의 자택화재로 숨진 고 김기영감독은 개성 강한 기인이었으며 우리 영화의 새 지평으로 끊임없이 달려간 만년영화인이었다. ‘유성영화사’란 간판이 걸려있던 그의 자택에는 영화제작때 쓴 칵테일바와 소품 포스터 영화서적으로 가득했다. 서울대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가운을 벗어던지고 영화에 뛰어든 그는 늘 “메스 대신 메가폰을 들고 삶과 무의식을 해부한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임했다. 그의 대표작들은 파격적 발상과 개성있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인간 무의식과 뒤틀린 성적 욕망을 다뤄 우리 영화사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평가 김시무씨는 그의 ‘이어도’ 한 대목을 보고 파격성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인공의 죽음을 알고 찾아온 애인이 죽은 이의 씨를 받기 위해 무당 앞에서 시신에 대롱을 달아 관계를 갖지요. 검열에서 잘렸던 대목이었는데, 우리 영화사에 이렇게 기괴한 대목도 있었구나 하고 놀랐습니다.” 31편에 이르는 그의 작품이 처음부터 이처럼 기이한 스타일을 띠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 그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분위기가 나는 사실주의 성향의 영화를 만들었다.‘초설’(58년) ‘10대의 반항’(59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0년 대표작 ‘하녀’를 만든 후 작품색조는 달라졌다. ‘하녀’는 공장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작곡가가 여공 하나를 가정부로 들인 뒤 그녀를 범한후 낙태시키나, 끊임없이 유혹하는 하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동반자살하는 내용이다. 통상적 리얼리즘감각으로 보면 이상한 전개지만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중산층의 심리를 표현주의적 영상으로 능란하게 담아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그는 경제적 성적 무능력에 시달리는 남성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여성들 이야기를 담은 ‘하녀 시리즈’를 만들어왔다. ‘화녀(火女)’(71년) ‘충녀(蟲女)’(72년) ‘육식동물’(84년) 등이 그것이다. 이 연작에서 드러난 기괴한 상황설정, 비일상적 대사, 뒤틀린 성욕에 대한 심리적 접근 등은 영화계 안팎에 그의 ‘추종자’를 형성해왔다. 하길종감독은 그를 가리켜 “영화작가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로테스크한 그의 작품세계는 최근들어 컬트영화가 주목받으면서 뒤늦게 강렬한 재조명을 받게됐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동숭시네마텍에서 회고전이 열려 적지않은 호응도 얻었다. 칸과 베를린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은 그를 “초현실주의와 심리주의적 영상을 만들어간 독특한 스타일리스트”라고 평했고 11일 개막되는 베를린영화제에는 그의 회고전이 준비되고 있었다. 고인은 베를린영화제에 다녀와 ‘하녀 시리즈’를 마무리짓는 ‘악녀’를 크랭크인하기 위해 노익장을 불태우던 차였다. 고인과 함께 숨진 부인 김유봉씨는 서울대의대 시절 교내 연극연출가와 배우 사이로 만나 치과를 운영하며 평생 그를 후원해왔다. 영화를 ‘인간연구학교’라 일컫던 그는 인간의 더욱 깊은 곳을 알기 위해 부인의 손을 잡고 명계(冥界)를 향해 날아갔다. 〈권기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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