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김지하의 서정시에 대하여

  • 입력 1998년 1월 13일 20시 04분


▼ 요약 ▼ 김지하(金芝河)는 물질적 이미지의 상상력을 매우 일관되게 보여주는 시인이다. 초기시에서 두드러진 불의 이미지는 후기작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핵심적인 도상(圖像·Icon)으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의 불 이미지는 흔히, 도전과 저항의 격렬한 서정을 드러내는 남성적인 상징으로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김지하는 불의 사제인 것 못지않게, 물의 시인이다. 지금껏 물 이미지는 비중있게 거론되지 않았으나, 이는 분명히 ‘불 이미지’와 더불어 김지하의 시적 상상력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동력원이다. 서로를 공멸로 몰아넣는 물과 불이라는 두 물질은 놀랍게도 한 시인의 세계를 함께 구성하고 있다. 그러한 물 이미지는 불이라는 원소를 중심으로 한 김지하 시의 남성적 면모를 이해하고 그의 시적 변모를 측량하기 위한 가늠자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김지하 시의 물 이미지는 반영적인 물의 이미지―자연의 거울이라는 유형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 자연의 거울로서의 물은 명시적으로 언급될 경우도 있지만 아주 암시적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용추다리’라는 시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일차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시적 자아의 영웅주의적인 욕망과 그 욕망의 불가능함에 대한 깨달음이다. ‘용추다리’의 화자는 “너희들의 죽음을 막고” “삶을 껴안아주고” 싶어하는 거대한 욕망, 불가능한 욕망을 소유하고 있다. 타인들의 생사마저 주관하고 싶어하는 그는 “내 오른팔을 호랑가시나무라고 불러라/내 왼팔을 사자봉 벼락바위라고 불러라”하고 소리치면서 초월적인 절대자의 위엄어린 명령어법을 모방한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자신의 신체가 높고 거대한 자연물처럼 상승 확장되기를 원한다. 이러한 욕구는 “나의 힘없음을 비웃는” 구름이 나타나면서 반전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구름은 “용추다리 건너가는 내 발 밑에” 있는 구름이다. 이 시의 화자는 물에 비친 구름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물에 비친 구름을 굽어보는 행위는, 초인적인 것을 추구하여 이끌려, 높고 거대한 표상을 앙망(仰望)했던 욕망의 움직임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어째서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높은 것, 거대한 것을 욕망했던 한 사람이 그의 욕망과 이토록 대립되는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일까. 이렇듯 극명한 지향성의 대조는 ‘용추다리’는 물론 반영적인 물 이미지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무심한 구름이 시적 자아의 힘없음을 비웃고, 그것이 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영웅주의적 욕망을 반성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사실과 그 구름이 수면으로 하강한 구름이며 따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체험이 거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들을 생산한다. ‘용추다리’의 화자에게 물에 비친 구름을 보는 체험이 혹시 자연의 거울을 통한 자기 확인의 체험에까지 닿아있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보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반영적인 물 이미지와 연관된 김지하의 시적 자아가 흔히 괴로운 자기 확인의 체험에 마주치고, 자신의 한계와 결함을 깨닫는 성찰적 자아로서 나타난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령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이라는 시는 자신을 “술 한 잔의 고름”이라고 자괴하는 화자가 시궁창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향해 소변을 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시적 자아를 나르시스라고 칭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도취적인 나르시스가 아닌, 당위(Sollen)와 존재(Sein)의 간극―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넘지 못할 괴리를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비극적인 나르시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발견이 인공의 거울이 아닌 자연의 거울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와 연관하여 나타나는 것이 예의 고개 숙이는 행위―‘하향적 시선’이라는 점이다. 남성적인 저항 복수심 증오 한 등의 비장하고 도전적인 정서를 자주 동반하는 불 이미지 중심의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반영적인 물과 연관된 작품은 흔히 비탄 자기 환멸과 같은 정서를 배음으로 삼고 있다. 당위와 존재의 괴리를 살피는 자기 확인의 매체로서 ‘반영적인 물’은 초기 시에서 특징적인 불의 미학과 ‘용추다리’에서 드러난 영웅주의적 경향을 견제하는 원리인 것이다. 그러나 반영적인 물을 통한 자기 확인, 자기 성찰은 욕망하는 바와 존재하는 바가 양분된 고통스러운 상태를 지속시키는 원리이기도 하다.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비녀산’)이라고 하는 초기의 시구는 자연의 거울을 통한 자기 확인의 고통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의 양상은 ‘삼라만상1’이라는 근년의 작품에 이르러 근본적인 변모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첫머리는 “썩은 물도 물은 물”이라는 긍정문으로 시작된다. “썩은 물도 물은 물”이라는 긍정적인 진술은 탁한 강물과 거기에 비친 푸른 하늘 사이의 분열상을 바라보면서 괴롭고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 진술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뒤이어 ‘삼라만상1’의 시적 자아는 그 썩은 물에 비친 구름의 모습을 보고는 돌연 썩은 물이 “깨끗이 되어/또 오고/또 돌아오겠다”고 얘기한다. 썩은 물이 깨끗이 되어 돌아온다는 말은 썩은 물과 흰 구름이 하나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진술이다. 고양된 순수성의 상징인 구름은 더러운 물이라는 ‘질료’가 자기 고양과 단련을 거쳐 정화된 ‘형상’인 것이다. 썩은 물이 “또 돌아오겠다”고 낙관하는 시적 화자는 사물의 외관에 대한 분별지의 차원을 넘어서 물과 구름이 하나의 물질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물과 구름이 동일한 물질이라는 깨달음을 통해서 탁한 강물이 흐르는 지상과 푸르게 빛나는 천상은 이제 분열을 멈추고 하나의 원환속에 자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미래적인 구름의 형상과 지금 존재하는 썩은 물을 동시적으로, 또 공존적으로 파악하는 체험이 없이 그 깨달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동시성과 공존의 가장 함축적인 상징은 ‘구름을 반영하는 썩은 물의 이미지’에 의해 표현된다. 그 이미지에 의하면 미래태인 구름의 형상은 잠재적 질료인 썩은 물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로써 존재하는 것(썩은 물)과 당위적인 것(정화된 구름)의 분열은 보다 근원적인 동질성에 의해 감싸이게 된다. 이제 시인의 사유 속에서는 마치 ‘무화과’의 꽃이 “열매 속에서 속꽃”으로 피어나듯이 백색의 구름은 썩은 물과 시궁창 속에서 피어오른다. 김지하의 물 이미지는 정화 조화된 형상(구름/속꽃)을 저 혼돈스럽고 더러운 질료(물/과육)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가능성으로 파악하는 사유의 역동성과 긍정성을 보여준다. 그 사유는 현재를 자기 고양의 가능성이 들끓고 있는 장소로 파악하고 그 가능성을 썩음 더러움 혼돈 등이 뒤얽힌 ‘운동’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며, 그러한 역동적인 가능성에 대한 신뢰에 바탕하여 더러운 현존재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렇게 거대한 긍정은 마침내 불과 물의 근원적인 대립마저 감싸안기에 이른다. ‘역여(逆旅)’라는 상징적인 제명의 시의 한 구절에서 시인은 불의 형상(붉은 연꽃)이 물이라는 질료(진창) 속으로부터 개화되는 순간을 드러냄으로써 양자 간의 하나됨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렇게 반영적인 물을 굽어보는 자세로 초기의 영웅주의적 자의식을 수정하고, 지상적인 존재에 대한 긍정을 통해 당위와 존재의 분열을 감싸안기에 이른다. 그러나 반영적인 물이 김지하에게 궁극적인 해결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내 마음을 쳐라/불타는 노을이여/(…)/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산란한 내 마음/더욱더 산란하게 쳐라”(‘쳐라’) 외치면서 물에 의지하는 자신을 불의 힘으로 부정한다. <김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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