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담집 안에서 흙의 숨결을 느끼는 삶을, 추억이 아닌 현실로 되살리려 하는 사람. 기용건축 대표 정기용(鄭奇溶·52)씨는 「흙박사」로 통한다.
석유 파동기였던 70년대 초 서구에서는 건축재료로서 흙의 가치를 재발견해냈고 구조역학 등 인접학문의 지원 속에 체계화되었다. 그때 한국에선 「초가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는」 새마을 운동과 함께 흙 건축문화는 사라져버렸다. 파리 유학 시절 상이한 두 흐름을 지켜보면서 그는 「흙」에 빠지게 됐다.
『인류 역사에 전통가옥을 그렇게 단시간에 해체해버린 적이 있었을까요』
농촌 근대화라는 깃발아래 허물어 내려진 초가지붕. 그러나 초가지붕과 함께 모든 뿌리 있는 것들과 심성(心性), 주거문화 관습같은 것도 바뀌고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40년대 이집트의 건축가이자 민속학자였던 하산 하티가 추진한 촌락 이주 프로젝트의 뜻을 되새긴다.
하산은 고대 이집트 왕국의 유적이 몰려있어 도굴이 잦았던 룩소르 부근 구르나마을 3천여 가구의 주민을 집단이주시키는 일을 맡았고 그 과정을 낱낱이 기록했다.
『유학시절 지하철 안에서 숨죽이며 읽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콘크리트 대신 역사속에 이어져온 흙벽돌로 새 촌락을 세우면서 전통가치까지 살려내려 했던 인물 하산.
전공을 바꿔가며 키우려했던 「사회적 실천행위로서의 건축」에 대한 정씨의 열망은 하산을 만나며 되살아났다.
대학 캠퍼스에 탱크가 머물던 60년대 초 미술학도였던 그는 거듭 고민했다. 「미(美)란 것이 도대체 사회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서울대 미대 석사학위논문의 한 구절에 그는 전공을 바꾸어야 할 사유를 남기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새롭게 선택한 분야가 보다 공적(公的)인 건축이었다. 파리 제6건축학교에서 건축사 자격을 얻고 돌아오기까지 13년. 그는 인류공통의 건축 재료인 흙을 재발견했다.
지천으로 널려 있고 수천년간 건축재료로 활용되어온 것이 흙이건만 막상 흙건축에 손을 대려 하니 기록이 없었다.
한 농촌활동가의 소개로 85년에 만난 충남 예산군 구억마을 장용순옹(당시 72세)은 그의 흙건축 스승이 되었다.
전통 흙건축 방식은 크게 세가지. 대나무를 심으로 삼고 짚을 썰어넣은 흙덩이를 바르는 심벽, 담틀에 다진 흙으로 만드는 담집, 그리고 흙벽돌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한국에서는 흙벽돌방식은 성행하지 않았고 주로 심벽이 이용되었으며 담집기술도 드물었다. 장옹의 집에 기거하며 흙담집 기술을 익힌 그는 안동 하회마을 등 아직 남아있는 흙담집 건축물을 찾아다녔다.
웬만큼 자신이 생긴 그는 88년 하산의 책을 번역한 「이집트 구르나마을 이야기」출판 기념회를 겸해서 흙건축사진전 및 흙으로 만든 다리와 흙담집 건축을 재현하는 행사를 가졌다. 만날 때마다 흙 이야기를 해대는 그에게 무용가 홍신자씨 등 지인들이 흙담식 건축을 부탁했고 직접 지어보자 자신이 붙었다. 유학시절 보았던 중동지역의 흙만으로 된 8층건물도 생각났다.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마을회관을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흙담집으로 결정했다는 소식은 정말 반가웠다. 「한국최초의 흙담식 공공건물 1호」인 마을회관은 현재 60%정도 일이 진척된 상태.
또 이웃 무수동마을에 들어설 33가구의 예술인 마을도 모두 흙담집 방식으로 짓고 있다.
물론 그사이 궁정동 터에 세워진 효자동 사랑방, 서울예전 드라마센터의 재건축, 의왕 계원조형예술전문대와 진주 동명중고교 신축건물 등의 설계를 했다.
『요즘 건강에 좋다는 말과 함께 흙 건축물에 관심이 많아져서 다행입니다』
인체에 좋은 흙 속의 원소 「라돈」의 효능을 선전하며 자연치료 요법으로 등장한 황토방. 걱정이 없지는 않다. 벽은 시멘트로 놔두고 방만 흙으로 하는 것은 어색하다는 생각이다.
『역시 사람이 문제예요. 기술을 가진 젊은 사람이 필요해요. 내년 봄 흙건축 기술자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할까 합니다』 진짜 흙건축 공부는 이제부터라는 얘기다.
〈조헌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