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신춘문예,새해 아침 빛나는 활자의 마력

  • 입력 1997년 11월 29일 08시 37분


새해 아침, 대문 앞에 배달된 두툼한 신문뭉치를 집어든 채 남몰래 눈물을 삼키는 이들이 있다. 철이른 꽃소식처럼 1월1일자 신문 몇개 지면을 가득 채우는 「신춘문예」. 그 축제의 주인공이 돼보려다 거절당한 사람이라면 깊은 좌절감으로 새해 아침을 맞게 된다. 「신춘문예」. 문학에 삶의 전부를 걸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젊은 혼들을 마약처럼 사로잡는 단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작가공인 시스템이자 어제의 백수건달이 그 「좁은 문」을 통과함으로써 단숨에 문단의 새별로 인정받는 화려한 통과제의. 그래서 찬사와 비아냥이 뒤섞인 별칭 「문단고시」로 불리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학제도. 신춘문예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호오(好惡)가 어떻게 엇갈린다 하더라도 신춘문예는 한국의 문학적 전통이요 유산이며 현실이다. 올해도 중앙일간지와 지방지를 합쳐 모두 21개의 신문이 신춘문예공고를 내고 차세대 문인을 배출해 낸다. 왜 유독 한국에만 「신춘문예」라는 독특한 문학제도가 뿌리내린 것일까. 신문에 「현상문예공모」가 등장했던 것은 이미 1910년대. 그러나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은 1925년 동아일보가 시행한 것이 그 기원이다. 동아일보는 이보다 앞서 「1천호 기념 문예작품 공모」(23년)「창간4주년기념 2천원 현상 소설 논문공모」(24년)를 통해 신춘문예의 터를 다졌다. 「신춘문예」의 탄생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치하 한국신문이 떠맡았던 「사회계도자」로서의 기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인하대 최원식교수는 『정치적 담론을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없는 식민지 상황에서 문학은 그 간접적 표현방식이었다』며 『특히 당시는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학술논문까지도 수십회로 나뉘어 신문에 게재됐을 만큼 신문이 문화의 표현창구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서울대 김윤식교수는 『독일정신주의에 깊이 영향받은 당시의 일본식교육이 수많은 문학청년을 낳은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중등교육이 「예술은 인생을 걸 만큼 대단한 것」이라는 가치관을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심어주어 문학을 하겠다는 엘리트 청년이 양산됐다』는 것. 문맹률 80%를 웃돌던 상황에서 이 문학청년들은 신문의 주요독자층이자 여론주도층이기도 했다. 일제하 신춘문예의 최대 공적은 「문학의 대중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문예지 「문장」 「인문평론」이 창간된 해가 신춘문예의 르네상스기였던 39년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50, 60년대는 「현대문학」 「문학과 예술」 「사상계」 등의 계간지들이 신춘문예의 경쟁상대였다. 이 문예지들은 선배 문인들이 신인의 작품 중 수작(秀作)을 2,3회에 걸쳐 추천함으로써 작가로 공인해주는「추천제」를 시행해 문단에 엄격한 도제관계의 질서를 세웠다. 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참여 순수 논쟁으로 전세대를 부정하고 등장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그룹이 새로운 도전세력이 됐다. 이들이 발간한 계간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는 신인을 데뷔시키며 과거의 문단 원로들로 운영되던 추천제를 부정했다. 80년대에 탄생한 수많은 무크지들은 필자선정과정에서 「등단」여부에 연연하지 않아 아예 「등단」 전통이 무의미해지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문단 데뷔방식이 다양해지는 추세 속에서도 신춘문예는 기라성같은 작가들을 배출해냈다. 박범신 최인호 이문열 오정희 한수산 최수철 이창동 임철우(소설가) 정희성 정호승 황지우 곽재구 기형도 안도현 이윤학(시인)…. 시대를 통찰하는 예민한 감성의 작가들은 여전히 신춘문예라는 비좁고도 화려한 문을 통해 탄생했다. 신춘문예는 90년대 후반 지금까지와 차원을 달리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신인작가」를 공인해주는 주체가 선배문인들에서 급격히 출판자본쪽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이후 수십만∼수백만권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양적 성장을 한 한국의 출판사들은 「오늘의 작가상」 「작가세계문학상」 「문학동네소설상」 「상상문학상」 「삼성문예상」 등 각종 문학상을 제도화해 신인작가를 배출한다.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문학상의 상금이 수천만원을 호가하며 문학지망생을 흡인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등단 이후 책 한 권을 내기까지 수년이 걸렸던 선배세대와는 달리 오늘의 문학지망생들은 출판사로 보낸 원고가 채택될 경우 책출판과 동시에 「작가」로 공인되는 구미형 시스템으로 이행해 가고 있다. 또하나의 도전은 「사이버공간」이라는 새로운 문학마당의 탄생. 펜보다 자판이 익숙하고 종이보다 모니터위에 뜬 글읽기를 더 편하게 여기는 세대 안에서도 문학예비군층은 두껍다. 이들은 한 사람이 작가 평론가 독자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문학적 권위」가 아닌 「조회수」로 새로운 작가를 탄생시킨다. 문학출판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 종적인 권위보다는 횡적인 공감이 더 중시되는 시대에 「신춘문예」는 과연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충남대 정과리교수는 『지금까지 신춘문예의 약점이라고 얘기돼 왔던 것이 역설적으로 미덕이 되는 시대가 됐다』고 낙관한다. 『심사위원들이 상업적인 이해에 좌우되지 않는 상태에서 공정성을 강요받으며 문인들을 선발해내는 제도를 「신춘문예」 외에 어디에서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전환점에 선 신춘문예. 그래도 그를 향한 「짝사랑」은 식지 않는다. 『신춘문예제도가 있다는 것을 새해 아침 한번씩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하다. 영상매체와 컴퓨터가 지배하는 시대에 활자문화를 보호하는 이런 제도를 고수한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이 썩 괜찮은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서울대 김윤식교수)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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