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고려학술문화재단 심포지엄]

  • 입력 1997년 11월 7일 20시 09분


《전세계 1백30여개국 5백30여만명에 달하는 재외한인(在外韓人)들의 이주역사를 짚어보는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동아일보사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사장 이상득·李相得)은 7일 고합그룹(회장 장치혁·張致赫) 후원으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근대(近代) 한인의 해외이주와 한민족공동체」를 주제로 제10회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국내외 역사학자 등 참석자들은 한인의 거주규모가 큰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지역에의 이주 역정(歷程)과 의의를 고찰했다.》 이광규(李光奎)서울대교수는 기조발표를 통해 근대 한인의 해외이주 역사를 크게 4기(期)로 구분했다. 각 기별로 가난을 피해 중국 러시아 하와이로 떠난 「농업이민」(1860∼1905년)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이민」(1905∼1919년) 「노동이민」(1919∼1945년) 「자유이민」(1965년 이후)의 형태를 띤다는 것.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외국에서 살아온 이주자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민족운동 독립운동을 위해 최선을 다한 애국자』라고 이교수는 평가했다. 펑밍후이(澎明輝)대만국립정치대교수는 「중국 동북지역의 한국인 이민의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인의 중국 동북지역으로의 이주배경을 국내외적 요인으로 분석했다. 국내적으로 △만연된 세도정치로 인한 부패 △척박한 토지와 연이은 자연재해 △서구열강의 침략이, 외부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의 동북지방 개척과 개방 △국경의 근접과 토지의 비옥을 들었다. 이들 개척민은 조선 중국 러시아 일본 4국의 핍박 아래 역사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되고 말았고 1백여년에 걸친 피땀어린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펑교수는 덧붙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지역의 한인이주역사에 대해 발표한 시에쥔메이(謝俊美)상하이화동사범대교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상하이는 조선독립운동의 중심이 됐다』면서 상하이거주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운동은 물론 중국인의 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 중국의 해방에도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미주(美洲)로의 이주역사를 고찰한 이길용(李吉鎔)동국대교수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로 이민이 시작된 이후 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 박용만(朴容萬) 등 한인지도층은 독립운동을 소명으로 여겼고 교민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토로포프 블라디보스토크극동문서보관소장은 한일합방 후 많은 한인이 연해주로 몰려들어 신한촌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토로포프교수는 그후 볼셰비키혁명에 이은 내란과 열강의 간섭기에 접어들어 한인의 이주규모가 점차 증가, 1937년 소련정부가 연해주에 살던 한인과 일본과의 연계를 우려해 이들을 중앙아시아 우즈베크 등으로 강제이주시킨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사토쇼닌(佐藤正人)도쿄(東京)아시아연구소장은 재일(在日)조선인의 역사와 민족운동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과 관련,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그보다 먼저 식민지로 삼은 북쪽지역의 아니누모시리와 류우큐우 왕국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따라서 일본인들은 당시 자국내에서 일어났던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정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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