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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7년 8월 11일 21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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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개의 신예작가들이 그렇듯 소설은 군데군데, 처마 밑에서 빗물이 새듯, 작가의 살아온 속내를 내비치면서 독자를 간지른다. 이끼처럼, 바이러스처럼 자아의 폐쇄공간에서 번식해온 내성(內省)의 목소리로 자욱하다.
언뜻 추리소설의 얼개에 기대고 있지만 현실과 세상의 외벽, 그 언저리를 서성이며 사투리와 표준어를 들락거리는 심리묘사가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발바닥과 상상력으로 써요. 발바닥은 밧데리가 나간 라디오를 탁, 두드리는 최소한의 자극이랄까. 무슨 별쭝난 체험을 하러 다니는 건 아니에요. 하릴없이 길거리를 배회한달지, 아니면 전철을 타고 「남자끼리 이상한 수작을 하면서 뻘뻘 땀을 흘리는 것」을 눈여겨 본달지, 그런 거요』
그래선지 소설은 현실의 구체적 계기에서 비켜선 채 「방안은 좁아도 할 일이 많고 세계는 넓어도 할 일이 없다」는 자의식으로 범람한다.
주인공 천수로. 그가 시간을 때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잠자는 것. 그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데」 바쳐진다.
그래서 그는 「똑각 똑각 병신육갑 떨듯이 흔들리며」 움직이는 시계바늘과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소일한다.
그런 그가 어느날 하릴없이 지하철 화장실을 기웃거리며 낙서를 구경하다가 마약밀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개구리파와 두꺼비파, 그리고 살모사파의 파벌싸움에 「끼인」 수로는 엉겁결에 마약과 돈가방을 들고 「튄다」.
그러나 수로는 목숨이 오가는 살벌한 상황 속에서도 진지해질 수가 없다. 삶의 경량화(輕量化)에 인이 박인 수로. 상황이 심각해질수록 자신과 세상에 대한 앙탈만 심해진다.
「세상도 뭐 그리 논리적인 것도 아니면서 별쭉시리 와 내한테만 논리를 강요하노? 내 머리통은 모눈종이가 쫙쫙 그있어서 왼쪽, 오른쪽, 위, 아래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줄 아나?」
그리고 잠깐이나마 수로를 「자갈치시장의 물 좋은 생선처럼 파닥거리게」 했던 마약과 돈가방이 사실은 가짜였음이 밝혀진다.
성(姓)인 「볼우물 청」자 만큼이나 현실에 밀착되지 못하고 「파여」 있는 수로. 그 틈에 고여 있는 것은 온통 가짜 뿐.
수로는 비로소 자신이 세상을 구박하는 동안 자신의 삶이 통째로 가짜들의 놀림감에 불과했다는 깨달음에 아득해진다. 「머리통에서 나사가 너무 꽉 조였다가 헐렁하게 빠져나가는」 존재의 위기.
마침내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진짜, 「머리 속의 숨은 1인치」가 절규를 토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저주이자 도전.
「거짓이라도 완벽하기만 하다면 나는 거짓을 사랑한다. 진실에 빌붙어 콩고물이나 만지면서 연명하기보다는 아름다운 거짓 속에 뛰어들어 한 순간이라도 생생한 현실을 즐기고 싶다…」.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