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아파트에서 맞벌이하는 큰딸 부부와 함께 살고 있는 이명자 할머니(63).
『동남아여행이라도 다녀올까, 몸에 좋다는 황토침대라도 하나 사볼까, 나중을 생각해 저축을 해둘까』
다음달 초에 만기가 되는 1천만원짜리 적금을 타 무엇을 할지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 요즘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올해초 유치원에 들어간 손자 명일이를 키우며 느낀 보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3년간 아이를 돌보기로 딸 김명희씨(34·S대 전임강사)부부와 한 「계약」에 따라 딸이 부어준 적금을 타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딸이 아이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대신 적금을 들어달라』고 조건을 내걸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손자 손녀를 키워주고 받은 용돈을 모아 목돈을 만들었다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었던 터라 무리한 부탁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딸 김씨는 『노인들은 손자 손녀를 보는 기쁨에 산다는데 엄마가 그런 요구를 해 처음에는 화도 났다』고 털어놓는다. 아이를 대신 봐줄 사람을 구하려면 더 많은 돈이 들고 미덥지도 못한 것이 사실. 김씨는 『엄마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노후에 목돈을 쥐고 있어야 안심이 되고 자식에게 말 못하는 돈 드는 일도 해볼 수 있으리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최근들어 손자 손녀 양육의 대가를 확실히 챙기는 「신세대 할머니」들이 늘고 있다. 구두로 하는 것이지만 기간과 대가를 명시한 「손주양육 계약」을 하기도 한다. 매달 용돈을 받지 않고도 생활이 되는 할머니들은 목돈을 만들어 해외여행 등을 하기 바란다는 것.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아파트에서 퇴직한 남편과 단둘이 살고 있는 한경숙씨(59)는 맞벌이하는 며느리가 매일 아침 데려다놓는 세살짜리 손녀를 돌본다. 4년간 아이를 돌본 뒤 「목돈」을 받기로 약속한지 올해로 2년째. 요즘에는 『남편과 노후를 즐길 시간이 거의 없다』며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 「단호하게」 손을 놓겠다고 벌써부터 공언한다.
대가족제에서는 「의무」처럼 받아들여졌던 할머니의 손자 손녀 양육에 「금전」이 끼여드는데 대해 야박한 세상이 됐다고 개탄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생활수준이 높아져 늘그막을 즐기려는 노인이 많아질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될 것이라고 노인문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노인의 전화」 강경만사무국장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친할머니라도 양육비를 받고 손자나 손녀를 돌봐주는 경우가 많다』면서 『어른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오히려 자녀쪽에서 적극적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중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