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50)

  • 입력 1996년 12월 22일 20시 19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24〉 현석의 말이 이어진다. 『당신은 내가 여러 애인 중의 하나라는 걸 환기시키곤 했어. 그래서 언짢게 헤어진 날이 있었지. 집으로 가려고 길을 건너오는데 다 건너기도 전에 벌써 후회가 되는 거야. 다시 당신한테 돌아가려고 신호등이 바뀌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당신이 택시를 잡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이더라구. 초조하게 신호등을 보다가 파란불이 들어오자마자 뛰어갔는데 벌써 택시가 출발해 버렸어. 그래도 계속 뛰어가다가 갑자기 내 모습을 보니 너무 우스꽝스럽게 여겨지더라구. 그냥 돌아와버렸지. 누군가 보고 있었다면 횡단보도 위에서 왜 저렇게 우와좌왕하는지 꽤 우스웠을 거야』 현석은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그런 일이 힘들어서 몇 번인가 당신하고 정말 헤어질 뻔했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배타적이고 자기애가 강하잖아.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끝내 몰랐을 거야. 난 운이 좋았어. 세상에 진정으로 남을 사랑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정으로 남을 사랑할 수는 없어. 사랑이란 다 변형된 자기애일 뿐이야. 그런 감정이 필요하니까 자기최면을 거는 거라구. 지속되는 사랑이란 건 없어』 현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내 감정은 내가 알아. 난 너를 사랑해』 『나도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하게 마련이야. 기회가 주어지면 난 아마 지금 당신한테 품는 것과 똑같은 감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야.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 『누구라도? 그럼… 상현이형도?』 그의 입에서 전 남편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현석의 마음속에 아직도 그 이름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럼 내가 한번 증명해 볼까? 지속적인 사랑이 있다는 걸?』 하고 말하는 현석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내가 평생 당신 뒤를 따라다니면서 인생을 탕진하면 믿겠어? 내 임종에 와서 말해줄 테야? 저런, 아직까지 나를 사랑하고 있었어? 그럼 세상에 사랑이 정말 있긴 하나보네? 그 증명을 더 확실하게 하려면 내가 오래오래 살아야겠구나, 응? 몇 년이면 믿겠어? 오십년? 백년? 아니면, 천년?』 현석은 거칠게 맥주캔을 집어 한 모금 마시더니 카펫의 무늬만 쏘아본다. 그의 손 안에서 맥주캔의 모서리가 조금씩 우그러지고 있다. <글: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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