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영이/日 "납치문제 냉정 찾자"

  • 입력 2002년 9월 22일 18시 25분


요즘 일본은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 중 8명이 사망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으로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 매스컴도 피해자 가족의 비통함을 집중적으로 다루다보니 핵, 미사일 등 안보문제나 일본의 역사청산 등 북-일 정상회담의 다른 성과는 거의 빛이 바랜 듯하다.

이는 곧바로 총련계 재일교포에 대한 괴롭힘으로 나타났다. 총련계 학생들이 돌팔매질을 당하는가 하면 “죽이겠다”는 협박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 교포는 “한국 국적으로 바꾸고 싶다. 이렇게 만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원망스럽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이런 현상만 놓고 보면 북-일수교 교섭은 멀어지고 북한을 국제사회 일원으로 끌어내려는 노력은 또다시 난관에 부닥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냉정함을 되찾자”는 지식인들이나 시민단체의 움직임이 눈에 띄고 있다. 아시아 교류를 추진하는 시민단체 ‘피스보트’는 19일부터 도쿄(東京) 신주쿠(新宿) 등에서 집회를 갖고 재일교포에 대한 공격을 중단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들은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은 이해하지만 재일교포에 대한 공격은 또 다른 증오를 낳는다”면서 자제를 촉구했다.

22일 마이니치신문에 실린 여성작가 다카하시 노부코(高橋のぶ子)의 칼럼은 이런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는 북한의 납치사건을 비난하면서도 “이번 정상회담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납치문제가 아니라 핵이나 미사일 문제이며 일본의 장래 안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해 평화와 신뢰의 기반을 닦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식민지시대 일본이 조선에서 수십만명을 연행했을 때 그 가족들도 일본인과 똑같은 비탄을 느꼈을 것”이라며 일본의 과거를 돌아본 뒤 “일본인 스스로가 분노를 객관화하고 아시아 전체를 생각하는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납치문제로 들끓고 있는 지금, 일부에서나마 좀 더 중요한 미래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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