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엔론 스캔들

  • 입력 2002년 1월 28일 18시 46분


작년 1월 미국 텍사스주의 최대 도시 휴스턴을 방문한 적이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직후였기 때문에 그가 주지사로 재임했던 ‘정치적 고향’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그러나 휴스턴은 조용했다. 취임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는 물론 벽보 한 장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을 배출했는데 이렇게 잠잠할 수 있나.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미국인들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며 의아해했다. ‘당선 사례’와 ‘아부성 당선 축하’ 광고가 거리를 뒤덮는 ‘한국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자를 그들이 걸맞은 대화 상대로 평가하지 않았을 것 같아 지금도 얼굴이 뜨겁다.

▷다행스럽게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미국 최대 에너지기업 엔론사의 파산은 미국인들이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엔론사가 휴스턴이 근거지라는 인연을 활용해 부시 대통령에게 거액의 정치헌금을 하는 등 끈끈한 관계를 맺었고 백악관 참모 등 유력인사들에게도 각종 특혜를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급기야 엔론에 유리한 에너지 정책을 입안한 의혹을 받고 있는 딕 체니 부통령은 환경단체에 의해 피소되기에 이르렀다. 엔론의 부회장이던 사람은 일파만파로 번지는 사태의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권총을 쏴 목숨을 끊었다.

▷한국 언론은 이 사건을 흔히 ‘엔론 게이트’라고 지칭한다. 미국 언론이 엔론 사건, 심할 경우 엔론 스캔들이라고 부르는 사건을 엔론 게이트라고 하는 데 대해 선정적 보도라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자고 나면 새로운 의혹이 불거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각종 게이트와 엔론 사건은 오십보백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제3국 국민이라면 권력의 핵심이 연루된 양국의 비리의혹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추악한 것으로 드러나는지 관전하는 재미도 있을 듯하다.

▷부시 대통령은 엔론이 구명로비를 벌인 사실을 파문이 확산되기 전에 알았는지 여부를 추궁받고 있다. 본인은 부인하고 있으나 80%대였던 지지도가 70%대로 떨어지는 등 타격을 받고 있다. 궁지에 몰린 부시 대통령이 며칠 전 ‘편견(Bias)’이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방송 보도가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보여주는 책을 들고 나와 엔론 사건 보도에 대한 불만을 재치 있게 드러낸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여유가 지속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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